::: 허대인(許大仁) :::     


참의공 허대인(參議公 許大仁)은  시조로부터 23세손이다.
고려 개성윤공 교(開城尹公 僑)의 셋째 아들인 13세손 허응(許應)의 10세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재(家財)를 털어 의사(義士) 500인을 모아
무기(武器)를 갖추어 격서(檄書)를 띄우니 수천의 병졸들이 몰렸다.

충의(忠義)로써 기(旗)를 세우고 회령 오봉산(會寧 五峰山)아래 결진(結陳),
적세(賊勢)를 살피니 적의 무리가 함흥(咸興)에 있어 부령군(富寧郡)을 탈환하고
나머지는 요지를 점거하고 공은 주변 수령과 더불어 논의하기를 "적이 부령(富寧)에 있어
준험지는 점거치 못했으니 군사를 풀어 선점(先占)하면 적은 분산될 것이니
그때에 적의 본진을 쳐부수면 나머지는 지리 멸렬할 것이라 하였다.  

이에 주변 수령들이 동의함에 부령(富寧)10리길로 행군하였다.  
이에 적의 기세가 꺾였다.  
성문(城門)을 열게하고 성안의 사람들을 부르니 백성들이 모두 달려들어 반도들과
그 무리 700 여명을 무찔렀다.  
공은 백성들을 불러 위로하고 사후 대비케 하니 사람들은 나르는 장군(飛將軍)이라 하였다.  

공은 이어서 병졸을 4진으로 편성, 목석(木石)을 쌓고 매복(埋伏)하고 있다가
적이 동을  향하면 서응(西應)하고 서(西)로 향하면 동진(東進)하니
적이 두려워 신병(神兵)이라 일컫고 감히 범치 못하였다.  

공적(功積)을 조정에 아뢰매 공의 충의(忠義)를 치하하고 북방중진(北方重鎭)은
공과 같은 장수감이라야 한다고 하면서 수부령겸병마첨절제사(守富寧兼兵馬僉節制使)를 제수 하였다.

고종29년(1892) 임진(壬辰)에는 통정대부 이조참의(通政大夫吏曹參議)에 증직되고
2등공신(二等功臣)에 추봉(追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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