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7년(정조 21)∼1886년(고종 23). 조선 후기의 문신. 시조로부터
30세손이다.
자는 이로(而老), 호는 성재(性齋). 포천에서 악록공 허성의 9세손으로 출생했으며
정언 허형(許珩)의 아들이다.
황덕길(黃德吉)의 문인으로
성호학파(星湖學派)의 계승자가 되었다.
1835년(헌종 1) 39세에 늦게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40년 기린도찰방(麒麟道察訪)
1844년 전적(典籍)·지평(持平)을 거쳐 1847년에 함평현감으로 나갔다가 1850년(철종 1)에
교리·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춘추관기사관을 역임하였다.
이로부터 경연에 참여하여 국왕에게 유교경전을 해설하는 학자적 관료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1855년에 당상관이 되어 우부승지와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1862년 진주민란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민란의 소요가 일어났을 때 3정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864년(고종 1) 김해부사에 부임하여 향음주례를 행하고 향약을 강론하여 유도(儒道)를 크게 일으켰다.
또, 공무의 여가를 이용하여 젊은 선비들을 모아 직접 교육을 하였고, 임기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어 1876년 정헌대부(正憲大夫), 1881년 이조판서에 제수되고 1886년에는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이르렀다.
이익(李瀷)·안정복(安鼎福)·황덕길로 이어지는
기호(畿湖)의 남인학자로서 당대유림의 종장(宗匠)이 되어 영남 퇴계학파를 계승한
유치명(柳致明)과 더불어 학문적으로 쌍벽을 이루었다.
그의 사상은 주로 경연에서 경의(經義)와의 관련에서 항상 실심(實心)·실정(實政)을 강조하였을 뿐 아니라
현실에 투철하여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852년(철종3)에 양천허씨 족보 서문을 쓰셨고 1866(고종3)에 김해도호부사로
있으면서 김수로왕 재실당호를 숭선전(崇善殿)으로 정하도록 고종에게
진언하여 허락을 받게 하고 숭선전 비문(崇善殿 碑文)을 지었으며 1868년(고종5)에는
양천허씨 세고 발문을 쓰시는등 많은 문헌을 남기신분으로 우리
선조들 중에서도 가장 근세까지도 빛을 내신분이다.
경남 산청군 신등면 평지리에
있는 이택당(麗澤堂)내에 그를 모신 물산영당(勿山影堂)이 있으며 또한
김해시 대성동에 취정재(就正齋)에는 금릉영각(金陵影閣)이 있어 제례를
올린다.
저서 : [성재집]·[종요록 宗堯錄]·[철명편 哲命編]이 있고,
선비의 생활의식을 집대성한 [사의 士儀]가 있다.
*당상관(堂上官) :
조선시대 관리 중에서 문신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무신은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상의 품계를 가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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