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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우의 족보이야기]-(5) 양천허씨
ㆍ작성자 : 허찬회 ㆍ작성일 : 2010-04-04 (일) ㆍ조회 : 7543
[김진우의 족보이야기]-(5)양천허씨
국제결혼한 최초의 여성 시조(始祖)  

자료 : 디트뉴스24 
http://www.dtnews24.com/news/articleView.html?idxno=76666
2010년 03월 09일 (화) 17:02:31 / 김진우 sewora@naver.com  


뿌리공원에 조성된 양천허씨 유래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은 공암현(孔巖縣) 현재 서울 양천구 와 김포일대에서 대부농으로 많은 재물과 곡식을 비축하고 있었다.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이 후백제 견훤(甄萱)을 정벌시 군량이 떨어져 곤경에 처했을 때 많은 군량을 도와 왕건(王建)으로 하여금 후백제를 멸하고 고려(高麗)을 세우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에 왕건 태조(王建太祖)가 그 충의에 감개하고 선문(宣文)과 마주하니 공의 나이 99세 인데도 위풍이 당당하고 정숙한 지라 크게 감동하고 가부(假父)로 모시며 고려개국 벽상공신 공암촌주(高麗開國 壁上功臣 孔巖村主)를 봉하고 공암땅을 식향으로 하사 하였다.
 
이때부터 관적을 공암이라 했으며 오늘날 동주사공 판도좌랑공 대제학공의 삼계파(三系派)로 나뉘어 지고 있다. 이와 같은 양천허문(陽川許門)은 고려(高麗)와 조선조(朝鮮朝)를 통해 정승 16인 중추원사 6인 학사 9인 호당과 청맥리 각 6인 공신 9인 봉군 36인 그외 많은 문형과 옥당을 배출하는 등 적은 인구이면서도 동방의 명문벌족을 이루었다.
 
형제 정승에다 청백리로 이름난 충정공 종(忠貞公 宗)과 문정공 침(文貞公 琛) 대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초당공 엽(草堂公 曄)과 성(筬), 봉(篈), 균(筠), 난설헌(蘭雪軒) 허씨 불멸의 명저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한 동방의 의성 양평군 준(陽平君 俊) 높은 학문으로 정승에 오른 부훤당 욱(負暄堂 頊)과 묵재공 적(默齋公 積) 그리고 학문과문장 서예에 뛰어나고 유림으로부터 청의의 사범 도덕군자로 숭앙받는 문정공 미수목(文正公 眉穆) 등은 모두 허문(許門)을 빛낸 공암의 후손들이다.



대전시 중구 뿌리공원에 조성된 양천허씨 조형물 앞면(대전 중구청 제공)

작품명 : 기(氣) 
조각가 : 임 혜 숙 (경희대학교 미술대학원 졸)
작품설명 : 천지(天地)가 변화(變化)하며 한번은 찼다가 한번은 비게 되니 형체(形體)는 기(氣)에서 생(生)하고 기(氣)는 형체(形體)에 가리워진다. 일월(日月)의 번갈아 밝음. 한서(寒暑)의 왕래(往來), 나고 죽음,인사(人事)의 선악(善惡), 세도(世道)의 쇠태와 융성 등이 모두 하나의 기가 변환 (變換)하는 것으로 사람과 천지의 바른기가 서로 감동(感動)되어 천도(天道)를 일으키고 무한한 우주공간을 비상(飛翔)하는 기개(氣槪)를 상징 


허씨(許氏)
우리나라의 허씨(許氏)는 김해허씨(121,031명).양천허씨(130,286명).경주허씨(6,774명).광산허씨(1,669명).분성허씨(11명).시산허씨(태인,2,029명).양천허씨(130,286명).태인허씨(6,472명).하양허씨(16,344명).함창허씨(115명) 등 총 32본관에 인구는 지난 2000년의 조사때는 총 300,448명으로 나타났다.그러나우리나라의 모든 허씨(許氏)는 같은 뿌리라며 허씨대동보(許氏大同譜)를 간행하고 있다.

 
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陀國) 공주)이 허씨 도시조
                     
보주황태후 허황옥(許黃玉.서기 33~189년)
 

우리나라 허씨(許氏) 성(姓)의 연원은 가락국(駕洛國)의 시조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왕비(王妃)인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許黃玉,서기 33~189년)에 두고 있다.

허황옥은 원래 인도(印度)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 16세에 배를 타고 지금의 경남 창원시 웅동면 앞바다에 이르러 김수로왕의 영접을 받고 왕후가 되었다. 그 후 아들 10명을 두었는데, 허왕후가 자기 성이 이어지기를 간청하자 수로왕은 맏아들[태자(太子)] 거등(居登)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왕자에게는 허씨(許氏)로 사성(賜姓)하여 허씨 성은 수로왕비 허황옥의 성을 따르게 한 데서 유래한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불가에 귀의하여 하동칠불(河東七佛 : 경남 하동에 七佛寺가 있다)로 성불하였다고 전한다.

가락국 10대 구형왕(仇衡王 : 양왕(讓王))12년(서기 532년)에 신라에 합병되자 자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후 고려초에 와서 거주지에 따라 공암(孔巖), 태인(泰仁), 하양(河陽), 김해(金海)로 분관되었으며 공암은 곧 양천(陽川)이다.

공암(孔巖) 즉, 양천허씨(陽川許氏) : 시조는 수로왕의 30세손인 허선문(許宣文)
태인허씨(泰仁許氏) : 시조는 수로왕의 30세손인 허사문(許士文)
하양허씨(河陽許氏) : 시조는 수로왕의 33세손인 허강안(許康安)
김해허씨(金海許氏) : 시조는 수로왕의 35세손인 허염(許琰)

문헌에 보면 허황옥은 서기 48년  16세때 배에 석탑을 싣고 일행을 태운 배가 긴 항해 끝에 목적지인 가야의 도두촌(渡頭村)에 도착했고, 도두촌이 내려다 보이는 망산도(望山島)에서 봉화가 피어올랐다. 그곳이 창원시 웅동면 앞바다라고 한다. 그녀의 배를 보고 가야인들은 탄성을 흘렸고, 보고를 들은 수로왕은 신하 구간(九干) 등에게 계수나무 노가 달린 배를 저어가서 대궐로 모셔 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허황옥은 한마디로 거절했다.“내가 너희들을 모르는데 어찌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느냐?” 신하가 아니라 수로왕이 직접 나와서 맞이하라는 것이었다. 수로왕은 할 수 없이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임시로 장막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린 후에야 허황옥은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상륙하였다.

수로왕이 임시궁전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고 하며 수로왕을 만나기 전 치러야 할 자신의 의식을 행하였다. 높은 언덕에 오른 그녀는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을 제의 장소로 삼은 것은 의도적인 행위였다. 이는 자신이 건너온 바다신과 자신이 살아갈 토착신을 연결시키는 제의였는데 중보자는 물론 자신이었다.

제의를 마친 허황옥은 비로소 수로왕이 기다리고 있는 장막 궁전으로 나아가 자신이 데려온 신하들을 수로왕에게 소개하였다. 이는 자기 세력과 수로왕 세력 사이의 연합을 제의한 것이다.  수로왕은 "나는 공주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는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는 매우 다행한 일이오"라며 환영하였다. 이는 수로왕이 허황옥의 연합제안을 수락해 토착세력인 구간 등을 제치고 허황후 집단을 가야의 왕비족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하늘에서 <금줄>을 타고 구지봉에 내려온 수로왕과 아유타국에서 <붉은 깃발>의 배를 타고 온 허황후가 배타적으로 가야 왕실을 구성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허황옥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수많은 보물들을 백성들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자기 집단과 토착세력을 화학적으로 융합시켰다. 

 
 「가락국기」에도 "허황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이 땅이 꺼진 듯이 슬퍼했다"는 기록도 그녀가 토착민을 억압한 이주자가 아니라 가야 토착민과 화학적 융합 속에서 금관가야의 공동시조였음을 말해준다.참고문헌 <가락국기>
 가락국의 김수로왕(金首露王)은 허황옥(許黃玉)과  결혼해서 2명의 딸과 열 명의 아들을 낳아 그중 둘째아들에게 허씨(許氏)로 사성(賜姓:성을 내림)하여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로 시조가 국제결혼 및 여성이 도시조(都始祖)로 받들어진 문중이다.

가락국이 신라에 병합되고 그 자손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지자 살게 된 지역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또 허씨(許氏) 일파에서 인천이씨(仁川李氏)로 분파되고 양산이씨(梁山李氏)도 인천이씨로부터 분관된다. 허씨(許氏), 김해김씨,인천이씨,양산이씨는 모두 같은 혈족이라며  <가락중앙종친회>를 조직하여 가락국 후손들의 친목을 다지고 있다.

김해(金海)지방에서 살게 된 후손은 김해허씨(金海許氏),하주(河州:하양 河陽)에 옮겨 살게 된 후손은  하양허씨(河陽許氏), 공암(孔巖:양천 陽川)에 터를 잡은 후손은 양천허씨(陽川許氏)이며 시산(詩山,지금의 태인 泰仁)에 이주하여 세거한 후손은 태인허씨(泰仁許氏)로 각각 관향을 삼게 되었다.

허씨(許氏)에서 갈라진 인천이씨(仁川李氏)는 
신라 때 허기(許奇)란 사람이 사명(使命)을 받아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마침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이 일어나  당나라 현종(玄宗)을 호종(扈從:왕가를 뒤따르며 호위함)한 공으로 당나라 황실의 성(姓) 인 이씨(李氏)를 사성(賜姓:성을 내려줌)받고 소성백(邵城伯)에 봉(封)해졌다고 한다. 고려조에 와서 그의 후손 허 겸(許謙)이 역시 소성백(邵城伯)으로 봉해져 소성이씨(邵城李氏,소성은 인천의 별호)로 관적(貫籍)하여 시조가 되었으며 양산이씨(梁山李氏)도 인천이씨(仁川李氏)로부터 분관(分貫)하였다.

즉 김해김씨(金海許氏),허씨(許氏),인천이씨(仁川李氏),양산이씨(梁山李氏)는 한 형제이므로 성(姓)은 다르나 같은 종씨(宗氏)이기에 혼인을 안 한다. 김수로왕의 후손들은 이런 이유로 가락중앙종친회(駕洛中央宗親會:가락국의 후손이기에 가락종친회라고 함)를 조직해서 혈족의 유대를 다지고 있으며 모든 허씨(許氏)는 같은 뿌리이기에 허씨 대동보(許氏大同譜)를 간행하고 있다.

허씨(許氏)는 김해허씨(金海許氏)가 인구의 약 50%로 가장 많고 양천허씨(陽川許氏)가 40% 하양허씨(河陽許氏),태인허씨(泰仁許氏) 순이다. 허 씨(許氏)는 조선조에 정승(政丞:정1품 재상) 6명을 비롯 고려와 조선에 걸쳐 숱한 인물을 배출해 명문의 지위를 누렸다. 특히 양천허씨(陽川許씨)는 조선조에 정승 5명을 배출했으며 한 시대를 주름잡기도 했다.

 
양천허씨(陽川許氏)
조선조에 365명의 급제자와 허균.허난설헌.허목.허엽.허적.허준 등 현달한 인물 배출
    
 
양천허씨 조형물 뒷면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시조는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비(金首露王妃)의 30세손으로 전하는 대광공(大匡公 : 대광은 고려때 정1품 문관 품계) 허선문(許宣文)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따르면 그는 공암촌(孔巖村, 현재의 경기도 김포시 양천)에 살면서 농사(農事)에 힘써 많은 양곡(糧穀)을 비축하였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군량이 부족하여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군량(軍糧)을 보급해 주었다고 한다. 태조는 그 공에 대한 보답으로 허선문에게 가부(假父 : 의부)라 부르고 공암(현재의 양천)을 식읍(食邑 : 공이 많은 사람에게 그 고을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 쓰게 하는 것)으로 하사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식읍지인 양천(陽川)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허선문(許宣文)의 손자 허원(許元)이 고려 목종때 과거에 급제하여 내사 사인(內史舍人 : 고려때 내사문하성의 종4품 벼슬), 지제고(知制誥 : 국왕이 반포하는 조서.교서를 지어바치는 보문각.한림원 관원이 겸직함), 태자사의(太子司議) 등을 지냈으며 증손 허정(許正)은 예부상서(禮部尙書 : 정3품 벼슬.장관)를 지낸 후 태자태보(太子太保 : 정1품 벼슬)에 이르렀다.

허정(許正)의 아들 허재(許載)는 일찌기 병마사(兵馬使 : 각 지방에 두어 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의 무관으로 병사.절도사라 함)로 있을때 여진의 정세를 파악하여 변경수비의 방책을 왕에게 올려 채택되기도 하였다.

후손 허공(許珙)은 고종때 문과(文科 : 대과)에 급제하고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서기 1284년(충렬왕 10) 수국사(修國史 : 정사의 기록, 사서의 편찬을 맡아본 사관(史館)의 종2품 벼슬)를 겸하여 허원부(許元傅) 등과 함께 고금록(古今錄 : 고려 중기에 저술한 사서로 고구려 계승의식과 자주적 사관에서 기술, 박인량이 저술함)을 찬술(撰述)하고 첨의중찬(僉議中贊 : 첨의부의 종1품 재상, 문하시중이 바뀐 것)에 올랐다.

조선조에 와서는 재령 군수(載寧郡守 : 군의 으뜸 벼슬인 종4품 외관직) 허손(許蓀)의 아들로 우의정(右議政 : 정1품 벼슬. 의정부 정승)에 오른 허종(許琮)과 좌의정(左議政 : 정1품 정승)을 지낸 허침(許琛) 형제가 명성을 떨쳤다. 허종(許琮)은 일찌기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과 도적(盜賊) 장영기(張永奇)의 난(亂)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병조판서(兵曹判書 : 정2품 벼슬)에 올랐으며 기록에 의하면 그는 장신(長身)으로 궁마(宮馬)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문명(文名)이 높아 문무(文武)를 겸비한 명신(名臣 : 이름난 신하)으로 유명했다.

허종(許琮)의 동생으로 좌의정에 오른 허침(許琛)은 1475년(성종 6) 알성문과(謁聖文科 : 조선조에 왕이 성균관에서 알성한 뒤에 보던 문과)에 급제하고 학문과 덕행으로 세자(世子)의 총애를 받았으며 삼강행실(三綱行實 : 세종 때 엮어진 도덕서로 3강(綱)의 모범이 되는 충신.열녀.효자등 105명을 칭송 한 책)을 산정(珊定 : 글자와 글귀를 다듬어서 잘 정리하는것) 했다. 허침은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 : 정2품벼슬). 우참찬(右參贊 : 의정부의 정2품 벼슬)과 우의정(右議政 : 의정부의 정1품 정승)을 거쳐 좌의정(左議政 : 정1품 의정부 정승)에 이르렀다.그는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 잡으려 애썼으며 학문이 깊고 특히 문장(文章)에 뛰어났다고 한다. 상신(相臣 : 정1품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검소한 선비의 생활로 주위의 칭송을 받았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한편 선조 때 좌의정(左議政 : 정1품 벼슬. 정승)에 오른 허욱(許頊)은 허종(許琮)의 현손(玄孫 : 손자의 손자, 고손자)으로 광해군때 능창군(綾昌君, 선조의 손자이자 원종의 아들) 추대사건에 연루되어 원주에 유배되었다.
 

조선조에서는 초당(草堂) 허엽(許曄)과, 미수 허목(許穆)이 명성을 떨쳤다.
허엽(許曄)은 군자감 부봉사(軍資監 副奉事 : 군량미 등 군수품의 저장. 관리 출납을 맡아본 관청, 으뜸 벼슬은 정3품 당하관으로 정(正), 부봉사는 정9품벼슬)를 지낸 허한(許澣)의 아들로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선조때 동서분당(東西分黨) 속에서 동인(東人)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그는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 :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과 허자(許磁). 구수담(具壽聃) 등의 무죄를 논하다가 한 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 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을 숙위하던 중추부의 종2품 벼슬)에 이르렀다.

허엽은 허성(許筬).허봉.허균(許筠).허난설헌(許 蘭雪軒)등 4남매가 있었는데 모두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허난설헌(許蘭雪軒)은 규수시인(閨秀詩人)으로 이름을 떨쳐 황진이(黃眞伊).신사임당(申師任堂)과 함께 3대 여류(三大女流)로 꼽혀왔다.

허난설헌은 늦게 결혼하였고, 금슬도 원만치 못했다고 하며 친정에 겹친 화액에 따른 고뇌를 시작(詩作)으로 달래며 독특한 시 세계(詩世界)를 이루었다.

조선의 봉건적 사회제도의 개혁을 부르짖은 사회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작가로 유명한 허균(許筠)은 서얼(庶蘖 : 서자)을 차별대우하는 당시의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 철폐와 반계급적 평등사상을 주장하여 한국사상사(韓國思想史)에 있어 근대화의 시발점을 이룬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숙종 때 우의정(右議政 : 정1품벼슬.정승)에 오른 허목(許穆)은 정구(鄭逑)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당대의 거유(巨儒)인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던 대학자로 유명하다.

허목은 학문과 문장(紋章).그림.서예에 뛰어났으며 특히 전서체(篆書體)에 통달하여 '동방(東方)의 제일인자'로 일컬어졌다. 허목이 세상의 이치를 생각하여 읊은 시(詩)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無可無不可吟(무가무불가음)
一往一來 有常數 (일왕일래 유상수)
한 번 가고 오는 것에 이치가 있는데
萬殊初 無分物我 (만수초무분물아)
온갖 이치도 처음에는 둘이 아닌 것
此事此心皆此理(차사차심개차리)
이 일 이 마음도 같은 것
孰爲無司孰爲司(숙위무사숙위사)
누가 그르고 누가 옳단 말인가.

영의정(領議政 : 정1품 정승)을 지낸 허적(許 積)은 서기1678년(숙종 4) 재정의 고갈을 막기 위해 상평통보(常平通寶 : 1633년(인조 11)에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여 약 200년간 통용되던 엽전)를 주조하여 이를 사용케 했으며 궤장(궤장연에서 왕이 내리던, 지팡이와 안석)을 하사(下賜)받고 기로소(耆老所 : 정2품 이상의 70세가 넘은 문관을 예우하던 기구로 1394년(태조 3년)에 설치하였는데 군.신이 같이 하는 기구라 최고의 서열로 여김,태조.숙종.영조대왕이 기로소에 들어감)에 들어가 가문을 크게 빛냈다.

그 외 선조 때 명의(名醫)로 호성3등공신(扈聖三等功臣)에 오른 조선의 히포크라테스 허준(許浚)은 16년간의 연구 끝에 25권의 방대한 의서(醫書)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하여 한의학(漢醫學) 발전에 크게 공헌했으며 양평군(陽平郡)에 봉해졌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수백년이 지난 현대에도 의학의 보감이며 지침서로 제약 관련 연구진 및 한의사 등의 필독서다.

양천허씨(陽川許氏)의 분파(分派)는 크게 동주사공파(東州使公派),판도좌랑공파(版圖佐郞公派),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의 3파로 나뉘어지고 다시 몇개로 세분된다.

허난설헌(許蘭雪軒). 허균(許筠) 남매는  조선조에 양천허씨(陽川許氏) 가문이 낳은 천재들이다. 아버지는 부제학(副提學 : 홍문관의 정3품 벼슬)과 경상도 관찰사(觀察使 : 종2품 외관직. 감사)와 부제학을 지낸 주기파(主氣派)학자 허엽(許曄)이다. 장남은 이조판서(吏曹判書 : 정2품 벼슬)를 지낸 허성(許筬)이며 차남 허봉(許篈)은 부사(府使 ; 정3품 외관직 벼슬)에 올라 당대의 뛰어난 재사들로 일가족이 모두 5문장(文章)으로 명성을 떨쳤다.

허균(許筠)은 1569년(선조2년)에 태어나 1618년(광해군10년) 50세 때 능지참형을 당하기까지 벼슬에서 여러 번 쫓겨나는 등  실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그는 벼슬길에 있을 때도  자유분방한 사상과 행동으로 당시 보수적인 유림들로부터 미치광이 패륜아 부도덕자로 조소를 받았으나 오늘날엔 선구적 사상가(思想家)로 새로운 평가를 받고 있다. 재승덕박(才勝德薄)의 성품 탓으로 드러난 많은 인간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썩고 병들고 불평등한 계급사회에 과감히 도전했던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적서(嫡庶)의 차별이 심해 서자의 등용을 제한하던 당시의 제도와 관습에 항거했고 마침내는 세상을 변혁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은밀히 동지들을 규합해 두 차례에 걸쳐 쿠데타를 시도하기도 했다. 끝내는 이 같은 기도가 발각돼 능지처참의 혹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회개혁 사상을 담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우리 고전문학의 백미이다. 그의 분신과도 같은 홍길동(洪吉童)은 서민 대중의 우상으로 살아 숨어왔다. 그의 문재(文才)의 한 면을 보인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점에서도 국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각종 문헌 참고> 중국을 여러차례 왕래하며 천주교 서적을 처음 들여왔으며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담배를 피운 사람이 허균(許筠)" 이라는 설도 있다.

27세로 요절한 허난설헌(許蘭雪軒)도 규원(閨怨), 추한(秋恨), 유선사(遊仙詞) 등 주옥같은 시(詩)들을 남겨 우리 여류 문학사에선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조선시대의 뛰어난 여류 시성(詩聖)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성 특유의 감상과 애상적 시풍(詩風)으로 독특한 시(詩) 세계를 이룩했고 그의 작품 일부를 동생 허균(許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건네 주어 중국에서도 허난설헌집(許蘭雪軒集)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다.

양천허씨는 조선 중기에 당파싸움의 중심에 있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서인(西人)의 영수(領袖:단체의 대표가 되는 사람) 송시열(宋時烈)과 예송(禮訟 : 예법에 관한 논란) 시비를 벌였던 남인(南人)의 영수 허목(許穆).허적(許積)은 조선 당쟁사의 거두(巨頭)들이다.

12촌간이던 이들은 남인(南人)이 득세하면서 허적(許積)이 영의정에 허목(許穆)이 우의정(右議政 : 정1품 벼슬. 정승)에 나란히 올랐으나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처벌 문제를 놓고 의견대립을 보여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갈렸다.

특히 허목(許穆)은 학문에서 송시열(宋時烈)과 쌍벽을 이룬 당대의 대유학자로서 당시 허문(許門)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그는 학.문 서(學.文.書)의  삼고(三古)라 불렸으며 특히 그의 전서(篆書 : 전자체로 쓴 글씨)는 <동방 제일>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오리(梧里) 정승 이원익(李元翼)의 손주사위이자 선조 때의 문장가. 풍류객인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외손이기도 한 그는 대유학자였지만 벼슬길엔 나가지 않고 있다가 56세에 처음으로 참봉(參奉 : 종9품 벼슬)에 천거됐다.

그러나 이 자리에도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다  63세 때 비로소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 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5품 의 벼슬)이 되었고 나이 80이 되던 1674년(숙종1), 2차예송(禮訟) 논쟁때 남인(南人)이 서인(西人)을 누르고 집권하게 되면서, 대사헌(大司憲 : 백관을 규찰하던 종2품 사헌부의 으뜸 벼슬로 검찰총장). 이조참판(吏曹參判 : 종2품벼슬)을 거쳐 우의정(右議政 : 정1품 의정부 정승)에 올랐다.

이들에 앞서 성종.연산군 때에 각각 우의정(右議政 : 정1품 정승)을 지낸 허종(許琮).허침(許琛) 형제와 허종(許琮)의 현손(玄孫 : 손자의 손자.고손자)으로 선조때 좌의정(左議政 : 정1품 정승)을 지낸 허욱(許頊), 허 침(許琛)의 아들 허 굉,

무오사화(戊午士禍:1498년(연산군 4) 류자광등의 훈구파가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에 대해 일으킨 사화)때 5현(賢)중 한사람인 허반(許磐) 등도 모두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인물들이다.

상우당(尙友堂) 허종(許琮)은 일찍이 세조 때 이시애의 란(李施愛亂)과 장영기 란(張永奇亂)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고 병조판서(兵曹判書 ; 정2품 벼슬.장관)로 승진된 뒤에는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師 : 전쟁이 났을때 군무를 통할하던 임시 무관직으로 병권을 도맡았음)로 변방의 여진족을 소탕했다.

문.무(文武)에 모두 명성을 떨친 그는 우의정(右議政 : 정1품 벼슬.정승)으로 있던 1479년(성종10년), 계비 윤씨(연산군의 생모)를 폐위하는 조정회의에 가던 중 누나의 충고에 따라 일부러 말에서 개울로 떨어져 훗날 갑자사화(甲子士禍)때 화를 면했다는 일화가 있다.

허침(許琛)은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 잡으려 애썼고 시문(詩文)에도 뛰어났다.

 
운림산방
재능 많은 허씨 전통의 한 갈래는 남도(南道) 진도(珍島)의 운림산방(雲林山房)에서 <3代畵脈>으로 피어났다.

소치 허유(小痴 許維).미산 허형(米山 許瀅).남농 허건(南農 許楗)으로 이어지는 3대의 한국남화(韓國南畵)는 우리 예술사의 자랑스런 한 줄기이다. 일문의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역시 이들에 못지 않은 한국남화의 거목으로 허씨문중을  크게 빛냈다.

한국의 히포크라테스 허준
조선조의 허씨 인물 가운데 또 하나 특기할 사람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펴낸 한국의 히포크라테스 허준(許浚)이다. 그는 선조의 어의(御醫)로 있으면서 의서(醫書)를 저술하라는 명을 받고 양예수(楊禮壽). 정예남(鄭禮男). 김응탁(金應鐸) 등과 집필에 착수했었으나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선조30 정유년에 왜군이 우리나라를 두 번째로 침입해온 난리)으로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작업이 중단됐고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는 모함을 받아 한때 유배까지 되었다. 허준(許浚)은 이 같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집필을 시작한지 15년만인 서기 1610년 25권에 달하는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 우리 의학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의학이 발달된 지금도 한.중.일에서 한의학의 바이블로 평가되며 독일에서까지 번역본이 출간됐다.

지난 2009년 7월31일,조선시대 불멸의 의학서인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은 한국의 7번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됐다.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동년 7월 31일(한국시간) 유네스코 사무국 마쓰우라 사무총장이 중앙아메리카 바베이도스 수도 브리지타운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9차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한국이 등재 신청한 동의보감 초간본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승인했다고 말했다.

이로써 한국은 1997년 훈민정음과 조선왕조실록의 두 건을 시작으로 2001년에는 직지심체요절과 승정원일기, 2007년에는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 조선왕조의궤에 이어 모두 7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우리나라의 세계기록유산은 아시아에서 가장 많고  세계에서는 6번째로 많아 문화선진국으로서의 위상을 높였다.

또한 동의보감이 조선시대에 한글로 번역됐었다는 사실도 2009년 7월 31일 확인됐다. 이래호 전북대 쌀ㆍ삶ㆍ문명 연구원 HK 연구교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간한 반년간 학술지 <장서각> 21집에 게재한 논문에서 한글 필사본 동의보감의 서지적 특징과 국어학적 특징을 자세히 소개했다. 이 필사본은 <내경편>의 1권, 3권, 5권 총 3 권만 전해지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소장한다.

이 교수에 따르면 번역본 동의보감은 문법적 특징 등으로 볼 때 19세기 중반 정도에 언해(諺解)됐으며 어려운 한자어를 많이 쓰고 있어 전문 지식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언해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있다. 이 교수는 "1970년대 이후 10여 종의 번역본이 나오긴 했지만 조선시대의 한글 번역본이 발견되기는 처음"이라면서 "한글 번역의 통일성을 기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고 당시 언어의 쓰임과 어휘의 변천을 연구하는 자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허씨(許氏)가 배출한 인물 중 조선침술의 대가(大家)로 평가 받는 허임(許任.1570~1647)이 유명하다.그는 미천한 관노출신임에도 선조임금과 광해군에게 직접 침을 놓았던 인물로 명의(名醫) 허준과 어깨를 나란히 한 "침술의 대가"이다.

허임(許任)은 노년에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에 정착하여 현대 침술의 효시가 된 <침구경험방>을 저술했고 공주에서 수 많은 수제자를 길러냈다. 2009년 6월18일에는 (사) 허임기념사업회가 주관한 '허임선생침구경험방 간행 356주년 기념'행사가 열렸으며 6월20일에는 허임이 침구경험방을 집필한곳으로 알려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에서 '집필마을기념식'을 개최하기도 했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양천허씨(陽川許氏)는 1985년에는 총 27,338가구에, 인구는 114,866명이었고, 2000년에는 총 40,260가구에, 인구는 130,286명으로 조사되었다
 양천허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 ; 대과)에 95명, 무과(武科 : 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였음)에 27명, 사마시(司馬試 : 생원.진사를 뽑던 시험)에 233명, 역과(譯科 ; 중국어.몽고어.일본어.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기위한 과거)에 3명, 의과에 4명, 주학에 3명 등 모두 365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가문을 크게 빛냈다.

본관소재지 양천(陽川)은 경기도 김포 양촌면 일대의 옛 지명으로 신라 경덕왕 때 공암현(孔巖縣)으로 고쳤으며 율진군(栗津郡)의 영현이 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양천현(陽川縣)으로 개칭되어 현령을 두었으며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1896년(고종 33)에 경기도 양천군(陽川郡)으로 개편되었으나,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경기도 김포군(金浦郡)에 흡수되었고,1979년 양천군 관할이었던 양동면과 양서면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김진우 (49세). 공주고.고려대 졸업.1970년대 부터 금석문에 관심많아 각종 비문(지석.신도비.묘갈명 등) 연구. *전국의 문화유적 탐방 지방사 연구. *족보전문가 *민족문제연구소회원.*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회원 *한국성씨연구소 대표(현) <저서> 한국인의 역사(2009년 도서출판 춘추필법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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