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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물] 허균(1) 그는 홍길동이고 싶었다
ㆍ작성자 : 대종회 ㆍ작성일 : 2011-01-19 (수) ㆍ조회 : 3254
 
[역사속의 강원인물]
"나는 내 인생 내 멋대로 살리니"…그는 홍길동이고 싶었다
강원일보 / 2011-1-13  
 
희대의 천재 혹은 하늘이 낸 괴물 `교산 허균'  
 


  
 
 
■ 희대의 천재 혹은 하늘이 낸 괴물
허균은 강릉 땅 갯가에서 초당 허엽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허엽은 다 늙어 얻은 막내아들을, 형들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아우를, 천금처럼 귀애했다. 아버지, 형들, 누이까지 뜨르르한 문장가로 유명한 집안에서 허균 또한 어릴 적부터 드물게 총명한 자질을 발휘했다.
 
허균의 시대는 빼어난 기개나 영특함이 되레 재앙을 부르기도 하는 폐쇄적 중세사회였다. 성리학적 도덕관으로 무장한 조선의 지배세력은, 감추고 숨기고 낮추고 조심하는 덕을 갖지 못한 허균의 천재성을 미워했다. `선조실록'과 `광해군일기'에서 허균은, “총민함과 문장의 화려함이 근래에 짝할 사람이 없지만, 망령되고 경박하며 또 행실을 단속하지 못하였다”고 평가한다. 사관들은 허균이 황해도사로 임명될 때 “행실도 수치도 없는 사람이다. 오직 문장의 재주가 있어 세상에 용납되었는데 식자들은 더불어 한 조정에 서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고 적고, 1618년 역적으로 몰릴 때에는 “하늘이 낸 괴물”이라고까지 회자됐다.
 
허균은 자신이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는 당대의 법과 도덕관념을 훤히 꿰고 있으면서도 보란 듯이 죄를 지은 확신범이었다. 그는 황해도사로 부임하면서 서울 기생을 데리고 갔고, 모친상을 치르는 와중에 기생과 잠자리를 가졌다. 다른 양반들은 그런 짓을 하더라도 눈치껏 몰래 하는데, 허균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문서로 기록까지 했다. 그 일들로 자신을 욕하고 벼슬을 빼앗는 조선사회에 대해, `성소부부고'에서 허균은 일갈한다.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고 남녀 유별의 윤리는 성인의 가르침이다. 성인은 하늘보다 한 등급 아래이니 성인을 따르느라 하늘을 어길 수는 없다.”
 
또한 그는 성리학만이 정통으로 용납되던 시기에 불교와 도교, 천주교까지 스스럼없이 섭렵하고 받아들인 이단아였다. 그는 사명당과 형제처럼 지내며 교류했고 “항상 작은 부처를 모셔두고는 … (중략)… 스스로 불제자라 칭하니, 승려가 아니고 무엇이랴(선조실록)”라는 탄핵을 받았다. 게다가 그는 도교에도 심취하여 선계를 동경했고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오면서는 세계지도와 천주교 기도서를 들여와 탐독했다.
 
여섯 번 파직당하고 세 번 귀양을 가면서도 허균은, 다른 생각을 금하는 답답한 세상, 그리고 그 세상보다 더 답답한 권력자들에게 결코 마음으로 승복하지 않았다. 유배지에서 쓴 `성소부부고'에서 허균은 이렇게 제 속내를 드러낸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법이나 쓰시오. 나는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살리니.”
 
 

■ 못 말리는 박람강기, 못 말리는 책 사랑
허균의 박학다식과 박람강기는 우리 역사상 맞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그는 수천 권의 책을 읽었고 그 내용을 기억했으며 수백 편의 시를 통째로 외웠다. 이렇듯 남다른 총민함과 기이한 문재 덕분에 허균은 중국 사신을 접대하거나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당시 양국의 외교 사절이 만나면, `수창(酬唱)'이라고 하여 시가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놀곤 했다. 원접사 이정구는 선조에게 “소신이 4, 5년 이래로 잇따라 고달픈 공무에 종사하다 보니 아예 책을 펴볼 여가가 없었고, 게다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쓰면 정신이 곧 혼망해집니다. 응접하는 이외에 수창하는 것은 필시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극히 염려됩니다 (선조실록)”라고 하며 외직에 나가 있던 허균을 데리고 가고 싶다고 주청한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명나라 3대 문사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주지번이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했을 때, 종사관으로 차출된 허균이 고금의 시문을 막힘없이 외우고 즉석에서 시를 창작하며 놀라운 솜씨로 주지번을 상대해내자, 그 자리에 허균과 함께했던 상촌 신흠이 “이 자는 필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뱀, 쥐의 정령”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중국국가도서관에 보관돼 있는 `조선시선'에는 신라의 최치원부터 고려의 이규보, 조선의 허난설헌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인들이 지은 한시 332편이 실려 있다. `조선시선'은 명나라 사신 오명제가 허균이 외워 소개한 시를 모아 편찬한 책이다.
 
병적으로 책을 사랑했던 `서음(書淫)' 허균은 `호서장서각기'에서 `만 권 책 속의 한 마리 좀벌레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형, 장인의 책들을 물려받은 것으로는 넘치는 지식욕을 채울 수 없었기에 사신으로 명나라에 드나들며 무려 4,000여 권의 책을 사서 들여오기도 했다. 계묘년 8월, 정한강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통 큰 허균이 책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쩨쩨하다 싶을 정도로 집요했음을 알 수 있다.
 
“옛 사람의 말에 `빌려간 책은 언제나 되돌려주기는 더디고 더디다' 했지만 `더디다'는 말은 1, 2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강(史綱)'을 빌려드린 지가 1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되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벼슬할 뜻을 끊고 강릉으로 아주 돌아가 그 책이나 읽으면서 소일하렵니다. 감히 사룁니다.”(허균 저, 김풍기 역, `누추한 내 방')

 
 
■ 하늘로 오르려던 이무기는 어떻게 추락했는가
허균은 명문가의 적자였지만, 자기가 살았던 시대의 불평세력이었고 정신적 서자였다. 그는 서자 출신의 유랑시인 손곡 이달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신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시대의 지배이념에 의문을 품었고 이후 수많은 서출과 기생, 무사와 노비를 친구로 사귀었다.
 
`유재론'에서 허균은, “사람의 재능은 하늘이 주는 것이라” 귀천에 따른 차별이 없으며, 우리나라처럼 작은 나라, 더구나 양편에 적을 둔 나라에서 서얼이라거나 개가녀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재능 있는 자를 등용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생각을 `전(傳)'의 형식으로 담아낸 작품이 바로 서얼 영웅이 이상국을 건설한다는 내용의, 저 유명한 국문소설 `홍길동전'이다.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호민론'은, 허균이 개혁사상가로 불리는 근거가 되는 글이다. 이 글에 따르면, 호민(豪民)은 잘못돼가는 세상일에 불만을 품고 인적 없는 곳으로 숨었다가 기회를 보아 불현듯 주먹을 흔들며 일어서는 자들이다. 호민이 선동하면 위정자들을 원망만 하던 원민(怨民)이 먼저 호응하고 입때껏 순종만 하던 항민(恒民)도 삽과 괭이를 들고 모인다. 허균은 우리 역사 속 호민의 예로 견훤과 궁예를 들며, “그들이 눈앞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위정자들은 백성을 무서워하고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광해군 5년(1613), 마음속에 견훤과 궁예를 품고 있던 `일곱 서자(七庶)'가 `홍길동전' 속 활빈당의 주요 무대로 등장하는 문경새재에서 은상(銀商)을 죽이고 은을 강탈하는 사건이 벌어져 이른바 `칠서의 난'으로 확대된다. 평소 칠서와 친하게 지냈던 허균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권력자 이이첨의 수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의 위태로운 결탁은 광해군 10년(1681), 허균이 남대문 흉서 사건의 주모자로 몰리면서 종말을 맞는다. 허균은 형신도 받지 않고 판결문도 없이 서쪽 저잣거리에서 대역 죄인으로 능지처참당했다. 의금부에 투옥되기 전날 밤, 허균은 그의 장서를 몰래 외손자의 집으로 빼돌렸다. 허균의 저작물이 오늘에 전하는 까닭이다.
 
강릉 앞바다 교문암의 전설에서 `용 못 된 이무기처럼 생긴 산'이란 의미의 교산(蛟山)이란 호(號)를 따온 허균… 그는 결국 스스로 지은 호의 운명을 온몸으로 살다갔다.

- 박정애 / 강원대 스토리텔링학과 교수

 
교산 허균 연보
■1569년 초당 허엽의 3남 3녀 중 막내 아들로 출생
■1580년 부친 허엽이 상주 객관에서 별세
■1585년 초시에 급제, 김대섭의 차녀와 결혼
■1589년 생원시에 급제
■1592년 외가 애일당 뒷산 이름을 따서 교산이라는 호를 처음으로 사용
■1593년 최초 시평론집 `학산초담' 지음
■1594년 정시을과 급제
■1596년 강릉부사 정구와 함께 `강릉지'엮음
■1597년 문과 중시 장원급제
■1603년 대관령에서 행해지는 산신제를 보고 `대령산신 찬병서' 지음
■1604년 성균관 전직이 되고 수안군수로 봉직
■1606년 `난설헌집'을 주지번에게 제공
■1607년 삼척부사, 공주목사 역임, `국조시산'편찬
■1611년 문집 `성소부부고' 64권 엮음
■1612년 최초 한글소설 `홍길동전'지음(추정)
■1614년 호조참의, 천추사가 돼 중국 사신으로 파견
■1615년 문신정시에서 1등을 하고 정2품 가정대부에 오름
■1616년 정2품 형조판서에 오름
■1617년 정2품 좌참찬에 오름
■1618년 기준격이 상소를 올려 허균을 모함해 서시에서 책형당해 생을 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