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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수 허목과 우암 송시열 (전서체와 양송체), 2018. 8. 26.
ㆍ작성자 : 허장호 ㆍ작성일 : 2018-09-08 (토) 13:40 ㆍ조회 : 235
        미수 허목과 우암 송시열(전서체와 양송체)
           otter 2018. 8. 26. 14:40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후... 한동안 피폐한 국토를 회복해야 하는데도 여념이 없었지만 지배세력이었던 사대부들은 오랑케의 나라에 무릎을 굻고 머리를 조아린 수치와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사실은 이때 왕조가 바뀌어야 했지만 조선사회에서는 다른 대안도 경황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기치로 내걸었던 것이 대외적으로는 '북벌론'이었고 또 내부적으로 흩어러진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예학'을 내세웠다. 바로 예학을 기본으로 하여 학문적, 정치적 논쟁을 벌였던 사건이 두번에 걸친 '예송'인데 이 사건의 중심에 바로 우암 송시열(1607~1689)과 미수 허목(1595~1682)의 학문적 대결이 있었다.



                                       미수 허목의 초상화               
 
                      
                              우암 송시열의 초상화



♧1차 예송(1660)
인조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올랐던 효종의 치세는 10년으로 그리 길지 않았다. 효종이 죽고 아들 현종이 즉위했을 때 인조의 계비였던 조대비의 상복이 문제가 되었다. 즉 죽은 효종이 장남이 아니기때문에(장남은 소현세자로 그의 아들 세손이 있었으나 봉림대군이었던 효종이 왕위를 승계함으로써 왕통이 바뀜) 부모의 복식이 간소하고 1년을 입어야 한다는 송시열과 서인들의 주장과 장남은 아니나 왕으로서 종묘제례를 주관하므로 그에 준하는 3년상복을 입어야한다는 것이 허목을 비롯한 남인들의 주장이 맞붙었다. 1차 결과는 송시열과 서인들의 승으로 지금의 헌법에 해당하는 '경국대전'을 전거로 하여 '장자 차자 구분없이 아들이 죽었을 때는 1년으로 한다'였다.

♧2차 예송(1674년)
14년 후 다시 효종의 비가 죽으면서 또 한번 시어머니 복상문제를 둘러싼 두번째 예송이 벌어졌다. 이때는 문제가 단순치가 않았다. 1년설의 남인측과 9개월설 서인측이 맞붙는데, 아들의 경우 장자와 차자의 구분이 없었으나 며느리는 아니었다.  9개월설이 차자에 적용되기 때문에 당시 왕이었던 숙종은 묵과할 수 없었다. 이로인해 정국이 바뀌고 1차와 마찬가지로 대신들은 귀향을 갔다.

♧허목과 송시열
허목은 부친의 임지였던 거창에 있을 때 성주 수륜에 있던 한강 정구를 찾아가 그의 문하에 들었다. 정구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모두에게 수학하고 예학과 성리설뿐만 아니라 제자백가, 역사, 의학, 지리 등 두루 능했다. 이러한 면모는  허목의 학문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허목은 송시열보다 나이가 13살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 주로 야인으로 학문과 편력의 기간이었기때문에 본격적인 관직생활을 시작했을 때 벌써 63세의 노령이었다. 그러나 1차예송의 패배로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가 2차예송 이후 정국의 주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의 이론은 명징했으며 심오하고 거침이 없어서 곧 남인 일파의 정신적인 사표가 되었다.



                                               
 
                                                  
 
                                     
 
                                     
 
                                      
 
                                                
 
 
  위, 미수 허목의 글씨

송시열은 그의 친척인 송준길과 함께 율곡 이이에게 사사하고 예학의 종장으로 일컫는 김장생과 김집 부자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그리고 그의 학문과 문장은
젊은시절부터 전국에 알려졌고 그의 문하에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 특히 관직에 오르면서 훗날에 효종으로 왕위에 오르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송시열은 관직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그러나 왕들의 절대적인 신임과 사림들의 중망, 그에게 거는 시대적인 과업은 그를 절대적인 위치에 올려 놓았다.

♧학문과 예술
허목의 학문은 주자학을 넘어 고학인 육경(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경, 악경)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였다. 즉 주자의 학문으로는 시대를 아우를수 없으므로 중국의 하ㆍ은ㆍ주의 전성기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춘추]의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낮춘다'는 예송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또 그의  문장과 글씨도 고문에서 길을 찾았다. 그의 학풍은 후에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 등 후대 실학자들에게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송시열은 후학들이 '송자'라고 일컬을 만큼 그의 학문적 영향력은 성인의 반열에 있었으나, 사실 그는 주자의 화신이라고 할만큼 주자학에 천착했으며 '대명의리'와 조선의 '소중화사상'를 주장했다. 또 조선후기의 정치와 학문을 그의 일당이 주도함으로서 전횡을 낳았고 그의 정치이론인 신권중심의 '세도정치'는 이후 심각한 왕권약화와 사회혼란을 가져 왔다.



                                          
                                         
                                            
 
                
 
                                             
 
 
  위, 우암 송시열의 글씨

두사람의 대결은 세기의 대결이라 할만하다. 둘다 기싸움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을뿐아니라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들의 글씨이다.
허목의 글씨는 진한시대 이전의 글씨를 탐구하는 전서체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대표작으로 '척주동해비'가 있다.
송준길과 더불어 양송체로 일컬어지는 송시열의 글씨 또한 웅혼한 기상을 담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서체로 한시대를 풍미했으며 그를 모방하는 글씨가 어디에나 나돌았다. 이들은 그들의 사상의 차이만큼이나 글씨로도 다른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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