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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액으로 살펴보는 미수 허목(許穆) 선생 전서 [이해빈(한국국학진흥원)], 2019. 4. 4.
ㆍ작성자 : 허장호 ㆍ작성일 : 2019-04-10 (수) 13:27 ㆍ조회 : 49
편액으로 살펴보는 미수 허목선생 전서|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황현주 | 조회 8 |추천 0 | 2019.04.04. 10:40

[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

편액으로 살펴보는 미수 허목 선생
전서를 새롭게 해석하다

정리 : 하해빈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네 번째 이야기는 전서(篆書)를 새롭게 해석한 미수(眉叟) 허목(許穆)선생의 글씨가 담긴 편액 두 개를 소개합니다. 먼저 편액을 소개하기 전에 미수 선생의 학문을 소개하겠습니다.
미수 허목 선생은 퇴계 이황 선생의 성리학을 물려받아 근기의 실학발전에 가교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미수 선생은 사서(四書)나 주희의 전통 주자학보다는 시(詩)·서(書)·역(易)·예(禮)의 오경(五經)에 관심을 더 많이 가졌는데요. 이를 통해서 미수 선생은 공리공론보다는 사회적 현실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에 접근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이는 나중에 실학의 태동에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수 선생은 사상적으로 이황과 정구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에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이며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미수 선생의 글씨는 어떨까요? 미수 허목 선생은 전서에 독보적 경지를 이룬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당시에는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서예의 최고 이상향으로 보고 있었는데요, 이 가운데 미수 선생은 고문학을 공부하면서 고전체(古篆體)를 바탕으로 하여 떨리는 필획의 독특하고 ′기이한′ 전서체를 만들어 냈습니다.


미수 허목 선생이 쓴 글씨 해동명필첩(海東名筆帖)에 수록된 미수 허목 선생의 전서이다.
한시를 전서로 쓴 독특한 작품이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그럼 미수 허목 선생이 쓴 글씨인 전서가 담긴 현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두 개의 현판을 소개하고자 하는데요, 두루종택의 경류정과 하회마을의 충효당입니다.



경류정(慶流亭)



진성이씨 대종택인 두루종택의 모습과 경류정의 내부 모습


경류정(慶流亭)은 경상북도 안동시 주하리에 있는 진성이씨(眞城李氏) 대종택인 두루(주촌周村)종택 별당의 편액입니다. 경류정은 이연(李演, 1492~1561)이 만년에 두루종택 앞 200미터 떨어진 곳에 건립했다가 그의 손자 이정회(李庭檜)가 지금의 위치로 옮겼습니다. ‘경류’는 『주역』, 「곤괘 문언坤卦文言」에 “집안에서 쌓은 것이 선하면 복과 경사가 자손에게 미치고, 쌓은 것이 선하지 못하면 재앙이 후세에 흐른다.[家之所積者 善則福慶 及於子孫 所積 不善則災殃 流於後世]”라고 한 데에서 취하였습니다. 한편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경류의 의미를 「제경류정題慶流亭」이란 시를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다음은 「제경류정」 3수 가운데 첫 번째 시입니다.

선이 쌓이면 원래 복과 경사 불어나는 법
몇 대 전한 인후함이 종파와 지파에 넘치네
그대에게 권하니 문호를 더욱 힘써 지키라
위씨 일가의 화수 모임을 매년 따르리라

善積由來福慶滋
幾傳仁厚衍宗支
勸君更勉持門戶
花樹韋家歲歲追



퇴계는 이 시를 통해 경류정 주인에게 선이 쌓이면 복과 경사가 넘쳐나니 문호를 정성껏 지켜주기를 당부하는 동시에 당나라 위씨(韋氏) 가족들이 꽃나무 아래에서 종친 간 화목을 다지려고 행한 전통적 가풍을 인용하여 위씨 집안처럼 종친 간 화목을 다지는 화수회를 해마다 따르겠노라 다짐하였습니다. 퇴계 선생이 쓴 편액과 미수 허목 선생이 쓴 편액 두 개가 걸려 있는데, 이 글씨는 미수의 친필입니다.


경류정慶流亭 / 42.2×85.3×5.8 / 전서(篆書) / 진성이씨 주촌문중(眞城李氏 周村門中)



충효당(忠孝堂)



서애 류성룡 종택의 전체 모습과 편액의 모습


충효당(忠孝堂)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종택의 편액입니다. 서애의 증손 우눌재(愚訥齋) 류의하(柳宜河, 1616~1698)가 충효당을 증축한 뒤 당호의 편액를 충효라고 하였습니다. 류성룡은 임종 직전에 자손들에게 “권하노니, 자손들아 반드시 삼가라. 충효 이외의 다른 사업은 없는 것이니라.[勉爾子孫須愼旃 忠孝之外無事業]”라는 유언시를 남겼는데요. 류의하는 서애가 평소 강조한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가르침을 받들어 당호를 충효당이라 하였습니다. 충효의 가치는 서애의 손자와 증손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가풍으로 형성되어 후손들에게 면면히 전해졌습니다.


충효당忠孝堂 / 84.0x196.0x6.6 / 해서(楷書) / 풍산류씨 류성룡종택(豊山柳氏 柳成龍宗宅)


경류정과 충효당은 퇴계 이황 선생과 서애 류성룡 선생의 집에 있는 현판들인데요, 미수 허목의 글이 두 선생의 집에 있을까요? 미수 선생과 류성룡 선생은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공부하였으며, 미수 선생이 두 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수가 직접 그들의 편액에 글씨를 넣은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보는 이황 선생과 류성룡 선생 모두 대단한 인물인 것처럼 말입니다.
미수 허목 선생은 1595년에 태어났습니다. 양란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세대이며 ‘조선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시대적인 고민을 가지게 된 세대입니다. 자신이 찾는 답을 위해 공부를 시작하게 되는데요. 그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인 송시열(宋時烈) 선생은 사서 중심으로 공부를 하였고 주자학(朱子學)을 따랐다면 미수 선생은 오경을 중심으로 공부하여 송시열 선생과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미수 선생은 이 과정에서 자신 만의 답을 찾았기 때문에 그의 특별한 전서체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편액 왜 봐야할까요? 미수 선생의 이야기에서 정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미수 선생도 과거의 학문을 공부하며, 자신의 길을 찾았으며 나아갔습니다. 편액이란 글씨를 쓴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며, 뜻을 담은 사람의 마음가짐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 시대의 편액을 보는 입장이 앞의 문장이라면, 지금 우리가 편액을 보는 입장은 어떠한가 한 번 고민을 해봐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으로 편액을 보고 있나요?

    고  :   한국의 편액 사이트

    리  :  하해빈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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