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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8-08-15 (수) 21:08 | ㆍ조회 : 2908 |
생년?∼1498(연산군 4). 조선 전기의 문신. 배위는 端雅 夫人 晋州姜氏 대간(大諫) 형(詗)의 따님이시다.(강형(姜詗)은 감찰(監察)로 임진년(壬辰年, 1472년 성종 3년)에 진사시에 합격) 할아버지는 監司 자평(子平)이고,曾祖는 贈 判書 강휘(姜徽)이시다 .外祖는 判官 善山金氏 승경(承慶)이다. 妻父 강형은 1495년(연산군 1)에 장령이 되고 그뒤 벼슬이 누진되어, 1504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같은 해에 일어난 갑자사화 때에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위하고 신주를 묘(廟)에 안치하려는 데 반대하다가 그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사위인 허반(許磐)과 함께 참형되었다. 墓는 부친 墓 상동(上仝)으로, 강남면 양배 쌍분(江南面陽排雙墳)으로 보책에 기록되어있다. 공께서는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이 되었다. 1494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이 해에 『성종실록』 편찬이 시작되면서 사관(史官) 김일손(金馹孫)의 사초(史草) 가운데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수록되어 있음이 밝혀져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나자 김일손·이목(李穆)·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 등과 함께 참형되었다. 평소에 글재주가 뛰어나고 인품이 단정하여 세칭 무오사화의 오현(五賢)이라 일컬어졌다. 뒤에 신원되었다.연산군은 성종이 죽자 훈구파를 옹호하며 사림파를 중심으로 부관참시와 조신들을 참형하거나 먼곳으로 유배를 보낸다. 연산군은 세자시절 스승인 조지서와 허침 두 분을 스승으로 모시었지만. 휘 허침께서는 온화한 가르침으로 엄한 조지서와는 달리 화를 피하신것 같다. 한편 세조공신인 한명회도 예외는 아니었다.어머니의 죽음을 두고 갑자사화에는 훈구파와 사림파도 화를 면치 못하였다. 그후 연산군은 금표지역을 선포하여 자신만의 영역을 늘리며 폭정을 이어 나가다가, 백성들의 원망과 훈구파에 의하여 강화로 유배되어 화병으로 생을 마감 한다. 어머니 폐비윤씨의 죽음과 조의제문으로 인한 두 사화는 결국 중종반정으로 막을 내리며 역사속으로 사라져 갔다. 연산군 일기 4년 7월12일기사 허반(磐)도 바로 잡혀왔다.좌의정 홍응(洪應)에게,세자는 훗날 디음대를 이을 임금이되면 만백성이 우러러 의지할분인데 지금 환관과 함께 거처하고 서연(書筵)에 나아가는 때가 적고,놀며 희롱하는때가 많다는 걱정을 털어 놓았다가,연산군에게 들킨적도 있다.이미 죽은 목숨 이었던 것이다.국문은 계속 되었다.연산군이 소릉의 관을 파서 바닷가에 버렸다,는 사초를 들이대며 세조에게 반심(反心)을 품은 증거이다 하였을때 김일손은 당당하였다.성종대의 출신인 신이 서를에 무슨 정이 있으리까,임금의 덕은 인정(仁政)보다 더한것이 없으므로 서릉을 복구 하기를 청한것은 군상(君上)으로 하여금,어진 정사를 행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연산군4년(1498) 7월 김일손은 함양의 남계에 있었다. 모친상을 끝내고 정여창이 살던 근처에 지어놓은 집에서 요양을 하며 더불어 공부할 요량이었다.여기에서 금부도사에게 체포되어 국청으로 끌리어 갔다.연산군은 성종실록에 편찬을 위하여 실록청(實錄廳)에 수합된 김일손의 사초를 직접 읽고 국문 하였다. 연산군은 네가 성종실록에 세조대의 일을 기록 했다는데 바른대로 말 하여라. 김일손은 신이 어찌 감히 숨기오리까.권귀인은 바로 덕종(德宗)의 후궁 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분부를 받들지 아니 했다는 사실을 듣고 적었습니다. 또한 연산군은 세조는 소훈윤씨(昭訓尹氏)에게 많은 전민과 가사를 내렸고 항상 어가가 따랐다,사초에도 신경을 곧추 세웠다.권귀인과 윤소훈은 성종의 생부 덕종으로 후손된 의경세자의 후실로서 세조의 며느리였다.궁정을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다.연산군은 자신을 비판한 김일손을 왕실을 능멸 하였다는 빌미로 죽이고 말겠다는 살기를 품었다.출처를 집요하게 추궁 하였다.연산군은 성종실록에 편찬을 위하여 실록청(實錄廳)에 수합된 김일손의 사초를 직접 읽고 국문 하였다. .김일손도 완강 하였다.사초의 출처를 밝히면 실록은 폐지 될것이다. 그러나 무서운 불 담금질에는 어쩔수가 없었다.허반(許磐)에게 들었음을 실토 하였다.세조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던 권귀인(權貴人,덕종의 후궁)의 조카이며,양자이기도 하였다. 墓는 부친 墓 상동(上仝)으로, 강남면 양배 쌍분(江南面陽排雙墳)으로 보책에 기록되어있다. 연산군 일기에서.... 우리 문중의 종침교의 일화도 생각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일부는편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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