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초 충남 공주 태화산 마곡사에 이르는 계곡 길은 봄 햇살에 반짝이는 연초록 나뭇잎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마곡사를 지나 야트막한 능선을 따라 20여분 산길로 더 올라가니 소나무와 대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집이 나왔다. 동양화가 허유(許臾·67·본명 허승욱)가 천년송 솔바람 소리와 친구 하며 그림과 글씨에 몰두하고 있는 곳이다.

그는 오른쪽 팔다리가 불편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20대 때 군대에서 당한 사고 때문이었다. 하지만 커다란 체구에 부리부리한 눈매, 크고 굵직한 목소리에선 언뜻 산속에 묻혀 사는 도인(道人)의 풍모가 느껴졌다.

집안에는 그의 작품 수십점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 대나무나 난(蘭) 같은 사군자(四君子), 학과 나비가 꽃과 어우러지는 작품 속 풍경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는 삶을 송두리채 뒤흔든 굴곡을 견뎌왔다. 그의 그림엔 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는 "한 자루 붓으로 40여년 동안 나를 지키며 살았다"고 했다.

"붓 한 자루로 나를 지켰다"

전북 남원의 한학자 집안에서 자란 그는 군 복무 때 동계훈련 중 뜻하지 않은 사고로 오른쪽 몸이 거의 마비됐다. 멀쩡하던 청년이 지팡이 없이는 잘 걷지 못했고, 말씨도 어눌해졌다. 갑자기 왼손잡이로 생활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과연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하는 깊은 좌절에 빠졌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 독일 대학으로 유학을 가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꿈을 키웠는데, 하루아침에 산산조각이 났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영어·독일어 공부하고 철학 책 읽은 것도 쓸모없게 돼 버렸다."

제대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주위 기대를 한몸에 받은 게 어제였는데 하루아침에 남 손가락질 받는 게 참기 힘들었다. 26세 때 경기도 남양주 천마산 기슭에 토담집을 짓고 동생과 함께 들어갔다. 복숭아나무·배나무 등을 심어 작은 과수원을 가꿨지만 돈이 되지는 않았다.

"마석·청평 같은 시골 5일장을 돌아다니며 인생을 배웠다. 장터에서 막국수와 막걸리 한 사발 놓고 수많은 사람과 얘기를 나누면서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그들은 소박했지만 진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나도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새벽에 일어나 입산(入山)할 때 갖고 왔던 먹을 갈았다. 그윽한 묵 향기 좋았다. 다섯 살부터 서당에서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배우고, 붓글씨를 쓰던 생각이 났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 보다'하고 붓을 들었다."

오른손이 불편한 그는 왼손으로 붓을 막대 잡듯이 쥐고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이 떨려 선(線) 하나 제대로 긋지 못했다. 처음 1년간 한 '일(一)'자만 무수히 썼다. 왼손을 오른손처럼 사용하기까지 10여년이 걸렸다." 정식 미술 학교에 다닌 적이 없는 그는 윤길중·김응현·이동주 선생을 찾아다니며 그림과 글씨 공부를 했다. 서울 관훈동 고서점 통문관을 드나들며 서지학자 이겸로 선생으로부터 교본(敎本)을 소개받아 좋은 글과 그림을 모방하며 익혔다. 유학 경전과 한문학 책도 파고들었다. 31세 때는 국가보훈처의 해외특별장학금으로 국립대만사범대 미술학과에서 8년 동안 공부했다.

"일요일이면 40~50㎞ 떨어진 인근 도시에 사는 대만 화가로부터 개인 지도를 받았다. 선생님에게 보여 드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꼭 조인 신발을 신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한두 시간 자고 일어나 그림을 그리곤 했다. 꼭 조인 신발을 신고 자면 발이 아파 오랫동안 잘 수 없었다."

"힘찬 선(線) 얻기 위해 수천 번 그린다"

귀국 후 1992년 공주 계룡산 갑사 인근에 머물다 3년 후 태화산 기슭 마곡사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1998~2013년에는 한서대에서 사군자와 문인화를 강의했다.

"산속에 머무르는 것은 가장 치열하게 작품에 몰두할 수 있어서다. 자연 속에서 내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깊은 밤 나무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천지에 가득할 때 자연의 숨결을 가슴 가득히 느낄 수 있다."

그는 "거창한 작품을 남기기보다 나약하고 좌절하기만 했던 내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며 "힘이 넘치는 일필휘지(一筆揮之)의 난(蘭) 그림을 얻기 위해 수백~수천 장의 한지를 폐지로 만들곤 했다"고 했다.

'허유(許臾)'는 그의 필명이다. 송나라 문장가 소동파의 '적벽부'에 나오는 '수유(須臾)'라는 말에서 따왔다. '수유'는 '잠시 동안'이란 뜻이다. 그는 "계룡산에 칩거하고 있을 때 짧은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며 '수유지간(須臾之間)'이란 말을 곧잘 썼는데, 이후 필명을 아예 '허유'로 했다"면서 "지금은 현재 이 순간을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생명의 불꽃을 피우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고 했다.

허유는 10여년 전부터 '해바라기' 연작(連作)을 그려 왔다. 붉고 푸른 바탕 위에 노란색 꽃이 불타오르는 역동적인 모습이다. 단 한 번의 붓놀림으로 꿈틀거리는 꽃잎을 표현했다. 그는 "불꽃처럼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해바라기 모습을 통해 험난한 세상에서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육체적으로는 약하디약한 존재다. 하지만 붓 한 자루만 쥐면 누구보다 강하다. 여기에 구름을 그려 넣으면 구름이 흘러가고, 저기에 산을 그리면 산이 들어선다. 무엇을 못 그리겠는가. 그림은 결국 나의 마음, 나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다. 화가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기 전에 조심스럽게 마음을 되돌아본다."

허유는 13~18일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그가 40여년 동안 눈물과 땀으로 그린 시서화(詩書畵) 작품전을 연다. (02)720-1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