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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천에서 미수공 친필 청화백자묘지명 발굴
ㆍ작성자 : 이준용 ㆍ작성일 : 2013-12-21 (토) 17:28 ㆍ조회 : 3046
계수동 ,청주한씨 묘역에서 '청화백자묘지명' 발굴
2013년 11월 21일 (목) 00:00:14 양주승 기자 webmaster@bucheontimes.com
부천타임즈: 양주승 대표기자
   
▲ 석함(가로32cm*세로40cm*두께 8cm) 발굴직후 석함에서 꺼낸 청화백자묘지명(각 1점당 가로 14cm, 세로 21.5cm, 두께 1cm)

한명회의 조카 한언 등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집성촌이 있었던 부천시 소사구 계수동  3-23번지에 위치한 청주한씨 묘역에서 336 여년 전으로 추정되는 '청화백자묘지명'(靑畵白磁墓誌銘) 과 묘지석이 발굴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한오규의  묘비석은 조선 중기<1595(선조28년)~ 1682(숙종8년)> 남인(南人) 실학파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석학으로 우의정을 지낸 미수(眉搜) 허목(許穆)의  글씨로한석봉, 추사 김정희의 서체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독창성과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각 지자체에서 발굴된 작품은 보물 또는 지역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미수 허목<許穆, 1595(선조28년)~ 168(숙종8년)>
11월 20일 부천문화원(원장 박형재) 향토문화연구소 양경직 수석연구위원은 지난 10월 29일 소사구 계수동산 3-23번지 한여직(韓汝溭) 상석밑에서  석함(石函) 1기, 한혜(韓橞)의 상석아래서 석함(石函) 1기와 청화백자묘지명  2점, 한오규(韓五奎) 의 상석 아래에서 석함(石函) 1기와  청화백자묘지명 2점 등 총 7점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양경직 수석연구위원은 "계수동 재개발로 2013년 3월~5월에 1차로 묘소를 이장하였는데 당시에 상석(床石)과 묘비석은 발굴을 안 하고 그대로 방치한 상태이어서 청주한씨 이양공(청평군) 파종중 한용진 회장에게 '한오규 묘비는 미수(眉搜) 허목(許穆:1595~1682)의 글씨로써 부천문화원에기증하면 차후 부천시 향토유적이 되도록 하겠다.그리고 남아 있는 상석과 묘비석 밑을 발굴할 테니 허락해 달라'하고 허락을 받은 후 문중과 협의 하에 발굴 했다"고 설명했다. 
가로 14cm, 세로 21.5cm, 두께 1cm의 청화백자묘지명은 석함(가로32cm*세로40cm*두께 8cm) 에 내장되어 있었다.
한여직(韓汝溭:1575~1638)은 1605년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으로 합격하고, 1610년 식년시(式年試)에는 갑과 3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뒤 가의대부(嘉義大夫:종2품)에 올랐으며, 형조·예조·공조의 3판서(判書)와 대사헌(大司憲:종2품) 등을 지냈다.
한혜(韓橞:1605~1634)의 아버지는 형조·예조·공조의 3판서(判書)를 두루 지낸 한여직(韓汝稷)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贈貞敬夫人) 능성구씨(綾城具氏)이다. 공(公)은 학문이 깊었으나 병약(病弱)하여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30세의 젊은 나이에 졸(卒)하여, 인천(仁川) 계곡(桂谷) 함박산(咸朴山) 선영(先塋:현, 부천시 소사구 계수동)에 장사(葬事)지냈다.
   
▲ 미수(眉搜) 허목(許穆)이 전서(篆書)로 써준 한오규(韓五奎)의 묘비석 글씨(이 사진이 옮기기 직전의 마지막 사진이다)

한오규(韓五奎:1621~1652)는 어려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약관(弱冠)에 이르는 7년 동안상복을 입고 지냈는데 한결같이 상례(喪禮)에 따랐다. 미수(眉搜) 허목(許穆:1595~1682)의 문하생으로, 가난해도 청렴한 절개가 있었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남과 더불어 사귐에 충직과 신의로 하였다. 몸가짐이 간결하여 당시 사람들이 모두 선사(善士)라 칭했으나 불행히 31세에 사망하였다.
   
▲ 청주한씨 이양공(청평군) 파종중 한용진 회장과 부천문화원 박형재 원장이 유물 기증 문제를 협의하고 있다 ⓒ부천타임즈 양주승 기자

한오규(韓五奎)의 청화백자묘지명(靑畵白磁墓誌銘)

[原文]有明朝鮮國學生韓公墓誌
 
韓五奎字文瑞其先本上黨人曾祖左參贊淸川君準祖禮曹判書汝溭父橞早世母密陽卞氏 刑曹參判三近之女也君生十三父歿十五時國有大亂祖母具夫人母卞氏皆歿於江都之敗君僅得脫而後年判書公又卒君自未成童至弱冠持衰者七年能喪祭有禮旣孤苦外祖父母皆老 事之必有至誠性廉介有志好施予善與人忠信持身簡潔心慕古人事必以古人訓戒自飭礪所與遊皆一時名譽稱善士不幸無命三十一死塾生七歲將死托其孤幼者韓五相鄭東稷二人東稷爲之服緦之絰帶終始經紀其家五相爲再從兄弟而君死之未久其父母皆亡未沒喪而死君娶漢城判官趙國俊之女長於君一年君死之前年殀折亦稱婦人媺德合葬于仁川桂谷韓氏族葬有一女一男壻士人李世茂塾少而能讀書謹行前年補國子生員生一男方未長嗚呼君以好德而短折固知天定在後世惟日勉焉而不懈德善之報不替歷識已化者行譽爲爾子孫之以勸以戒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 許穆 撰
崇禎紀元五十年 丁巳五月  日

   
▲ 청화백자묘지명(靑畵白磁墓誌銘

[번역]
한오규(韓五奎:1621~1652)의 자(字)는 문서(文瑞)이고 선대의 본관은 상당인(上黨人)이다. 증조(曾祖)는 좌참찬(左參贊) 청천군(淸川君) 준(準:1542~1601)이고, 할아버지는 예조판서(禮曹判書) 여직(汝溭:1575~1638)이고 아버지는 혜(橞:1605~1634)인데 일찍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卞氏:1603~1637))로 형조참판(刑曹參判) 삼근(三近:1579~?)의 따님이다.
 
군(君)은 태어나 13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5살 때 나라에 병자호란(丙子胡亂:1636년 12월)이 일어나 할머니 구부인(具夫人:1573~1637)과 어머니 변씨(卞氏가 강화도(江華島)가 패퇴(敗退)할 때 모두 돌아가셨다. 군(君)은 겨우 탈출하였는데 후년에 판서공(判書公:汝溭:1575~1638) 또한 돌아가셨다.
 
군(君)은 미성년 아이 때부터 약관(弱冠)에 이르기까지 7년 동안 상복(喪服을 입고 상예(喪禮)대로 하였다. 이윽고 외롭고 가난하였으나 다 늙으신 외조부모(外祖父母)을 반드시 지성으로 섬겼다.
 
성품이 청렴한 절개의 뜻이 있었고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며, 남과 더불어 사귐에 충직(忠直)과 신의(信義)로 하였고 몸가짐이 간결(簡潔)하였다. 마음은 옛사람을 마음으로 사모하여 반드시 고인(古人)의 훈계(訓戒)를 섬겼고 스스로 삼가면서 남과 사귀었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명예롭게 여겨 선사(善士)라 칭했으나 불행히 명운(命運)이 없어 31세에 졸(卒)하였다. 숙(塾:1646~1710)을 낳았는데 7세(歲)에 죽을 때 고아(孤兒)가 된 어린 아들을 한오상(韓五相:1620~1715)·정동직(鄭東稷) 두 사람에게 부탁하였다.

동직(東稷)은 상복을 입고 3개월 동안 복상을 하였고 처음부터 끝까지 집안 살림을 잘하여 생업生業)을 유지함을 하였다. 오상(五相)은 제종형제(再從兄弟)로써 군(君)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고, 그 부모 또한 모두 돌아가셨는데 상복을 벗지 못한 채 죽은 것이다.
 
군(君)은 한성판관(漢城判官) 조국준(趙國俊:1581~?)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장차 군(君)보다 1년, 군(君)이 죽기 전 해(前年)에 요절(殀折)하였다. 부인(婦人:1621~1651)은 착하고 아름다운 덕이라 칭하였다. 한씨족장(韓氏族葬)인 인천(仁川) 계곡(桂谷)에 합장(合葬)하였다. 
 
1남 1녀로 사위는 사인(士人) 이세무(李世茂:1681~?)이고 숙(塾)은 젊어서 독서에 능하고 근행하더니 전해(1673년)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1남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오호(嗚呼), 군(君)은 덕(德)을 좋아하였는데 젊은 나이에 일찍 죽었다. 진실로 하늘이 정해준 운명을 후세에 알고 있다면, 오직 날마다 힘쓸지언정 게을러서는 안 되고, 덕행과 선행은 보상을 받으니 버려서는 안 되고, 지식이란 지나고 나면 사라지는 것이니 명예를 행하라. 너희 자손들은 부지런히 힘써서 경계(警戒)로 삼으라.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허목 찬(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許穆 撰)

숭정기원 오십년(崇禎紀元 五十年) 정사(丁巳:1677) 5월 일

 

연천문화원 사무국장 이준용

허현
2013-12-21 19:37
귀중한 역사자료입니다. 지석(誌石,혹은 墓誌)은 예로부터 천재지변이나 오랜시간후 묘를 잃어버릴것에 대비,금속판이나 돌,陶磁板에 돌아가신분의 성명,생년,행적,묘위치등을 새겨 무덤앞이나 壙中(무덤속)에 묻었었는데 이 지석이 발견되었군요 감사합니다.
비문등에서 "有明"조선국이란 표현은 임란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를 우러러는 對明의리론에 의해 당시로서는 관습화된 표현입니다 (병자호란,명나라 멸망후에도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 논리는 지속되었음).
허현 미수공의 門下 한오규가 卒한 15년뒤에 묘지명을 지어(撰) 상석아래에 묻은것으로 보임. 묘비석의 전서는 미수공의 글씨지만 묘지명은 미수공이 찬하신것을 타인이 쓴(書)것으로 보임. 요즘은 書者를 밝히지만 옛날엔 모든사람이 한문을 쓰므로 대체로 글을 지은 撰者만 적시하였음. 더욱이 당시 83세 연로한 미수공께서 백자에 세필로 깨알같은 글자들을 써 넣기는 어려웠을것으로 봅니다. 12/22 07:05
이준용 허현님의 정확한 판단이십니다. 지석의 맨 마지막 부분에 의정부 우의정 허목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미수공께서는 생전에 자신을 가리켜 우의정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으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비석이 가지는 아주 특별한 부분이 있습니다. [상당한오규지묘]라는 구절이 여느 비석과는 파격적이라는 것입니다. 상당이라는 본관은 청주한씨를 이르는 또다른 표현입니다. 즉 청주를 백제시대부터 상당이라고 불렀고 한명회의 또다른 호칭이 상당부원군이었지요. 보통 본관 뒤에는 반드시 공(公)이라고 쓰고 다음에 휘(諱)나 성명을 쓰는데 이것이 생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예를 들면 전주이공 00지묘라고거의 대부분의 비석이 되어있지만 당시 한오규는 아버지 한혜도 미수공의 제자이고 그 아들 오규 역시제자인데 아마도 손주뻘이 되지요.
12/22 08:19
이준용 그러니 미수공께서 더더구나 손자뻘되는 제자에게 [상당한공오규지묘]라고 쓰기에는 좀 그렇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비석이 희귀성이 돋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점입니다.
저 역시 전국의 묘비나 묘갈 등을 수도 없이 찾아다니고 판독을 해왔지만 처음으로 대하는 파격적인 비석입니다.
그래서 더욱 가치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허현님의 정확하고 예리한 판단에 크게 감탄했습니다.
12/22 08:23
허현 과찬이십니다. 그 시대 사대부들은 親明排淸의식이 대단히 강했기에 묘지를 찬한 丁巳(1677)년은 청나라 康熙16년에 해당되지만 옛 명나라의 年號,즉 崇禎50년으로 쓴것이 특기할만합니다. 사실 조선의 연호로 肅宗3년으로 쓰도될일이지만 당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撰者(미수공)의 품계및 관직은 書者가 붙여 기록한것으로 보입니다. 12/22 17:32
   
허현강
2013-12-21 21:18
사전에 연락은 받았지만 이준용 사무국장님께서 이렇게 직접 자료를 올려주시니 양천허문을 대신해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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