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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6-10-10 (월) 21:23 | ㆍ조회 : 29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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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陽川許氏大宗會 所藏 古書... 2016. 10. 2. 촬영] 15世 孔岩君 諱 徵 文敬公昆孫祖提學公諱綱 考大提學公諱欽字懲 公은 忠惠王甲申(西紀1344年)生으로 性稟이 雅重하시여 考悌忠直하고 武藝가 남보다 뛰어나시어 恭愍王壬寅(西紀1362年)에 武科顯達로 忠定王의 사위가 되시고 駙馬都衛로서 孔岩君에 封하시고 禑王乙丑(西紀1385年)에 龍津縣令을 거쳐 西紀1390年庚午에 兵曹參議에 昇任되시고 西紀1392年壬申에 兵馬團練判官兼北道巡檢使로 西北邊境의 守備實態를 把握하는 任務를 遂行하는 中에 同年7月 麗朝가 亡하고 新進勢力인 李成桂가 登極하여 執權함에 系代로 桂籍에 오른 國孫之臣으로 義憤을 참지못하시고 傾國의 危變을 痛嘆하면서 松岳東南硯에 同志72人과 함께 義集하여 不事二君의 決意를 다짐하시고 다같이 官服을 벗어 마지막 四拜를 올린 다음 天地도 구슬퍼라! 慟哭하면서 벗어넣은 官服들을 燒却하시고 다함께 慟哭하시며 찢어진 옷에 헌 삿갓(破布廢笠)으로 미치광이 모습(佯狂被髮)을 하고 北關땅을 向하니 山川도 구슬프듯 보는 사람마다 慟哭하는 悲慘한 行列이었다고 한다. 一行은 定處없이 가다가 멈추어 遯居하면서 世上事를 介意하지 않으니 李太祖와 太宗은 數次 宣撫使를 보내였으나 一行은 끝내 志操를 굽히지 아니하고 生涯를 마치시니 後世 官民은 이분들이 遯居하던 곳을 杜門洞이라 稱하고 이분들을 杜門洞72人節士라 稱한다. 騎午集에 曰 "北道巡檢使許徵은 麗朝의 傾國위기를 當함에 吉州杜門洞으로 遯居한 72人中 36人의 首長"이라 云하며 公의 6世孫인 陽川君左贊成昉의 行狀記에 曰 "松岳東麓下에 一尺碑石이 有하니 이는 李朝에 不伏한 諸臣으로 卽 杜門洞節臣 72人을 列錄"한 碑石이라. 이 碑文 一句에 有曰 "縣令許徵은 麗朝失位에 慟哭하여(佯狂被髮) 머리를 풀어 미친체하고 入北하였으며 其 父는 欽이요, 其 祖는 綱이요 墓는 俱作牧牛之場"云이라 하였다. [출처: 2004년 발행, 陽川許氏濟州派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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