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천록(朝天錄)은 명나라에 가던 사신(使臣)들의 기행록(紀行錄)인데 사대관계(事大關係)를 맺었던 명나라에 간 사행(使行)에 대해서 이렇게 불렀고, 청나라 사행인 경우에는 연행록(燕行錄)이라 하였다.

하곡(荷谷) 허봉(許篈)선조께서 지으신 조천기(朝天記) 선조7년(1574) 5월13일자에는 도성을 출발하여 중국으로의 사행 도중에 당시의 대학자 율곡(이이)을 만났고,이어 중시조(中始祖)이신 문경공(文敬公,10世 휘珙)과 자신의 5代祖 호군공(護軍公,16世휘樞 자산공)의 묘에 참배하였다. 하곡선조는 이 기록에서 “문경공은 고려조의 유명한 재상으로 공렬(功烈)은 모두 국사(國史)에 실렸으나 묘소앞에는 비(碑)나 석마(石馬)가 없었으니 대개 연대가 오래 되었기 때문일것이다. 후손으로서 봉분이나 꾸밈을 못하니 이마에는 땀이 배었다”고 했다. 하곡선조는 젊은 나이에 귀양지에서 별세했지만, 아마도 생전에 형인 악록공(岳麓,許筬)과 묘역 봉심(奉審)에 대해 의논하였을것이다. 그리하여 1611년 악록공께서 문경공의 신도석표(神道表石)를 찬(撰)하고 수립(竪立)하였는데,이것이 400년이 지난 오늘 우리 후손들이 볼수있는 문경공 묘하(墓下)의 신도비(석표)이다.

선조7년(1574) 5월13일 맑음.

이른 아침에 파주를 떠나서 율곡(栗谷)마을에 다다라 이숙헌(李叔獻,율곡 李珥의 字가 叔獻임)을 방문하였다. 율곡(李珥)은 파주 서쪽 16, 7리쯤에 있는데, 이숙헌은 병으로 아직 일어나지 못하였으므로, 조카를 시켜서 나를 맞이하여 서실(書室)에 들어가 기다리게 했다. 오래 있다가 율곡이 나왔는데 그의 안색을 보니 전날과는 약간 달랐고 매우 피로하여 보였다. 그와 마주 앉아 먼저 시사(時事)에 미쳐 한탄을 하였고, 다음으로는 이(理)와 기(氣)는 한 근원[一元]이라는 것,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심통성정(心統性情), 무극 태극설(無極太極說)이나 명덕(明德)이 본심(本心)이고 양지(良知)는 천리(天理)가 아니라는 것과, 곤지기(困知記)는 가벼이 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주장을 논하였는데, 매우 만족해 하는것 같았다.

- 中略 -

해가 이미 높아졌으므로 나는 묘소에 참배[展墓]하기가 박두하여 이숙헌과 작별을 하고 그 뒷산을 넘어서 이른바 화석정(花石亭)이라는 데로 올라갔다. 그 집은 새로 지었는데 아직 칸막이를 하지 않았다. 정자의 앞으로는 임진강(臨津江)이 띠같이 내려다 보이고 멀리 서쪽 경계로는 여러 산을 손짓하는데, 비록 넓게 트인 것 같으나 형세는 지나치게 높고 가팔라서 오래 있기에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대체로 이숙헌이 이곳에 온 것은 본래 전원(田園)을 넓게 열고 종족(宗族)을 모두 모아서 같이 살고자 생각했던 것인데, 일은 뜻과 같지 않았고 집 일[家業]이 궁핍[伶仃]하여서 미음죽도 잇지를 못하였으니 참으로 연민(憐憫)할 만하였다. 지금 같은 때에 이러한 사람이 있는데도 그에게 궁벽한 산곡 속에서 먹는것조차 가난하게 하였으니 세도(世道)는 알 만하였다.

임진강을 건너 6, 7리를 가서 5대조 호군공(護軍公)의 묘소에 참배하였다. 부인 최씨도 같이 모셨는데 묘소 남쪽에는 조그만 비갈(碑碣)이 있었고 앞면에는 직함(職銜)을 썼으며 뒷면에는 역임한 관직의 천차(遷次)와 자손의 명호(名號)를 써 놓았다. 제사 지내기를 마쳤는데 얼족(孽族) 허수(許鐩)란 이가 묘소 옆에 살고 있었으므로 와서 보았다.

동파역(東坡驛)으로 돌아와서 조금 쉬었다가 조현리(朝玄里)를 향하여 떠났다.

시중(侍中) 문경공(文敬公) 묘소를 뵙고 또한 제사를 지냈다. 문경공은 고려조의 유명한 재상으로 공렬(功烈)은 모두 국사(國史)에 실렸으나 묘소 앞에는 비(碑)나 석마(石馬)가 없었으니 대개 연대가 오래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후손으로서 봉분이나 꾸밈을 못하니 이마에는 땀이 배었다.

늦게 개성부(開城府)에 들어갔는데 유수(留守) 유홍(兪泓)이 우리를 대청에서 맞이하였다.

상사와 질정관(質正官)과 목청전(穆淸殿 고려 태조를 제사 지내는 곳) 참봉(參奉) 박명립(朴名立) 등과 함께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부(府)에는 조그만 아이가 있어 노래를 부르고 술잔을 권하게 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