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여년 전 이곳에서 어린 허초희가 시를 쓰고 또 읊었다

초희(楚姬). 예닐곱 살부터 여신동이라 불렸던 그는 옥혜라고도 불렸다. 열다섯에 혼인한 후부터는 김성립의 부인으로 살았고 400여년 후에는 허균의 누이로 살았다.
또다시 50여년이 지난 2010년, 사람들는 그를 당대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이라

부른다.

글쓰는 여인들을 인정하지 않는 암흑의 시대 사대부를 놀라게 했던 난설헌의 문학혼이 아직 강릉에 살아 숨쉰다.

■허난설헌 생가터

강릉시내에서 강문 바닷가 쪽으로 발길을 옮기다 보면 초당동이 나온다.

이곳에 허난설헌 생가터가 남아있다. 생가터 주변에 울창하게 우거진 소나무 숲에서는

굳은 기상과 기품이 묻어난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으로 조성된 이곳은 원래 난설헌의 생가다.

난설헌의 동생인 허균은 사천의 애월당에서 태어났다.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뜬 천재 여류시인의 유일한 흔적이다.

생가터는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전형적인 가옥이다. 양반의 집임에도 사치스럽지 않은

검소함이 느껴진다.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가 `ㅁ' 모양으로 들어서 있다. 외부에는 낮고

긴 담이 놓여 정겨움을 더한다.

사랑채에는 넓은 대청과 방이 있다. 어린 허초희의 감성과 창작열은 이곳에서 꽃폈다.

안채에는 난설헌의 영정사진이 봉안돼 있다.

(사)허균·허난설헌선양사업회가 지난해 새 영정사진으로 봉안했다.

난설헌의 영정은 기존의 표준영정을 그린 동국대 손연칠 교수가 다시 그린 것으로

허엽의 직계 후손 여성 3명을 모델로 했다.

남편인 안동김씨 김성립의 아버지 김첨과 여동생 대경의 묘를 이장하던 중 발견된 의복을

기초로 하는 등 철저한 고증작업도 거쳤다.

봉안된 영정은 복사본으로 원작은 문화재청의 표준영정 교체 심의 등을 거쳐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허난설헌 기념관

생가터에서 나와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을 걷다보면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이 나온다.

난설헌의 문학혼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당시 생활상과 함께 동생 허균의 유물이 대거 전시돼 있다.

풍성한 작품활동으로 다양한 글을 남긴 허균과 달리 짧은 생애를 마감했던 허난설헌의

글도 이곳에서 찾을 수 있다.

남아있는 작품은 모두 5권. 이마저도 필사본이거나 사후 난설헌을 칭송하는 이들이 흩어져

있는 시를 모아 묶은 책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다. 난설헌은 8세때 이글을

지어 여신동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어영차 동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새벽에 봉황타고 요궁에 들어가 날이 밝자 해가 부상 밑에서 솟아올라 일만 가닥 붉은 노을 바다에 비쳐 붉도다.

어영차, 남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옥룡이 하염없이 구슬못 물 마신다.

은평상에서 잠자다가 꽃그늘 짙은 한 낮에 일어나, 웃으며 요희를 불러 푸른 적삼 벗기네.

어영차, 서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중략)”

섬세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문체는 난설헌, 자신과 꼭 닮아있다.

그는 이 글에서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는 가상의 선계(仙界)를 설정해 여성도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이상세계를 그렸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당대의 명필 한석봉이 허균의 부탁을 받아 1605년 쓴 글씨의 탁본으로 목판본은 중국 사신 주지번이 중국으로 가져갔다고 전해진다.

`허난설헌 난설헌집'은 1608년 목판본이 남아있다. 난설헌이 남긴 213수의 시가 담겨 있다. 작자미상의 `난설헌집 필사본', 2005년 발견된 석북 신광수와 난설헌의 시를 모아 만든

`석란유분 필사본', 숙종때의 시인인 허경란의 시와 난설헌의 시를 묶어 1913년 발간한

`난설헌 허부인집'도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오죽헌시립박물관에는 `난설헌집 목판본'이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보관됐다.

■허난설헌 시비

허난설헌 생가터 진입로에는 난설헌을 기리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1998년에 뒤늦게 허난설헌의 문학이 재조명되면서 강릉시여성단체협의회가 주축이 돼

비를 세웠다.

대리석으로 된 이 시비의 윗부분은 구름 모양을 본떠 형상화했다.

비석에는 허난설헌의 `죽지사(竹枝詞)' 중 세 번째 시가 새겨져 있다. `죽지사'는 난설헌이

고향 강릉에서의 추억을 담아 지은 한시로 강릉원주대 장정룡 교수가 번역해 비문을 지었다.

나의(우리) 집은 강릉 땅 돌 쌓인 갯가로    家住江陵積石磯    가주강릉적석기

문 앞 강물에 비단옷을 빨았다                  門前流水浣羅衣    문전류수완라의     
아침이면 한가롭게 목란배 매어놓고         朝來閑繫木蘭倬    조래한계목란탁

짝지어 나는 원앙새만 부럽게 바라본다     貧看駕鴦相伴飛    빈간가앙상반비

 

고향에 대한 아련함이 진하게 묻어난다. 님에 대한 그리움까지 더해 감성을 더했다.

열다섯에 시집가 다신 올 수 없었던 강릉땅을 그린 간절한 마음이 난설헌을 당대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만들었다.

자식을 잃은 마음과 마음껏 재능을 발할 수 없는 시대적 슬픔 역시 난설헌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짧은 생애를 살다갔지만 그의 문학은 그대로 강릉에 남았다.

■허난설헌 묘

난설헌은 결국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풍습대로 안동김씨 사람이 됐다. 난설헌묘는

시댁인 안동김씨 선산에 있다. 1986년 경기도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됐다.

남편인 김성립의 묘가 난설헌 묘 위쪽에 있고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뜬 두 아이의 무덤이

우측에 나란히 서 있다.

묘의 오른쪽에 있는 묘비는 오석으로 제작됐으며 전면에는 이숭녕(李崇寧)이 지은

`증정부인양천허씨지묘(贈貞夫人陽川許氏之墓)'라는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다.

강릉=원선영기자 haru@kw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