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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도 10세조 문경공 할아버지 탐방기
ㆍ작성자 : 허유권 ㆍ작성일 : 2018-11-29 (목) 23:28 ㆍ조회 : 516
2018년 11월 28일 수요일 아침 8시30분에 허찬 회장님을 비롯하여 허항무 전회장님 .현지에서 합류하신 허평환 장군님,대종회 사무총장 허동.총무 허재수 감사 허완.부회장 허엽.판도좌랑공 회장 허경행,합천공파 총무 허유,동주사공파 총무 허광학.대제학공파 허석 회장님,장단총친회장 허현강. 교위공파 운영위원 허억.허장호 기자 그외 양천허씨 여러 종친님들과 함께 대종회를 출발하여 문경공 할아버지 묘역을 2년여 만에 다시금 찾는 감회는 종원님들의 마음을 모두 설렘 그 자체였으리라.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는 공동지역(JSA) DMZ 통문을 지나 묘역에 도착 하여 할아버지 영전에 제수음식과 금초를 할수있는 장비 들을 종인들은 누구나 할것 없이 서로 챙기고 묘소에 올라 보니 2년여 기간이 지난 묘역에는 잡초와 나무들이 많이 자라 있어 4기 묘 봉분들이 판별 할수가 없을 정도 무성히도 자라난 것을 보니 공의 묘가 비무장지대 라서 매년 자주 찾아볼수가 없는 현실이라 가슴 한편으로 먼저 송구스러운 마음이 앞섰다.금초를 마치고 문경공 휘 허공(珙) 할아버지 졔례를 봉행 하였다.초헌관 허찬 대종회 명예회장님.아헌관 허항무 전 대종회장님.종헌관 대제학공파 허석 회장님.집례 허완 현 대종회 감사님.축관 사무총장 허동.우집사 총무 허재수.좌집사 부회장 허제행님의 순서로 문경공 할아버지 제례를 봉행을 마치고,이어서 동주사공 11세 휘 허정(程)할아버지 제례를 봉행하였다.초헌관 단양 향교 전교 허순범 .아헌관 참의공파 허건. 종헌관 대제학 부회장 허경 .집례 감사 허완. 축관 동주사공 총무 허광학.좌집사 부회장 허제행. 우집사 허유권의 순서로 제례를 모두 성황리에 마치었다.  군보안 관계로 핸드폰도 초소에 맡기고 와서 제례 장면이나 금초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을수 없어 아쉬운 마음 금할길이 없었다.70년도 군복무시절 나 역시 오래전 DMZ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어 그곳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알수있어 아쉽지만 어찌할수가 없었다.그래도 다행히 2010년10월에 방문시 영상을 담은 기록들이 있어  올려 보았다.또 한가지 이야기 하고 싶은것은 신도비의 문구들이 오랜 세월에 풍우에 글귀가 마모가되고 비 모서리가 부서져 나가 마음이 좋을수가 없었다. 다음에 방문시에는 대종회에 탁본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없으면 다음 방문시에는  보수 할수있는 장비 및 세척제와 신도비의 전후좌우 비문들을 전문가를 모시고 탁본을 떠서 영구히 보관 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비문을 보니 전면과 후면에는 많은 이끼들이 끼어있어 판독이 불가능 하였다. 옆면 우측에는 당시 비문을 세울때 참석하신 명단들이 새겨져 있었다.전면 우측에는 외가쪽 오리 아원익과 이항복등 당대 명성을  가지신 분들과 좌측에는 친인척 교산 허균. 허진.수색공 허적의 휘자가 희미하게 보인다.明 만력39년(1611)? 이라고 적혀 있으나 글이 보이지를 않아서 안타까웠다.
한편 우리 기해보에는 26世孫 교위공파 승정원승지(정삼품),가선대부(從二品) 지낸신  휘 허경(熲)이 무자년(戊子 숙종34년 1708) 장단부사로 재임시 문경공 할아버지의 表石을 개사(改莎새로단장함) 하였다고  전해진다.[ 長湍任 改莎 文敬公墓得誌石立表邑有遺愛碑] 그러면 이신도비는 명 만력 39년?에 누가 세웠을까? 탁본이 있으면 좋으련만  부인은 光州李氏 參奉 이태만(泰晩)의 따님이고.외조는 文化柳氏 유형길(亨吉)이다.혹 문경공 신도비에 대하여 자세히 아시는 종친이 계시면 글을 올려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2018년11월29일 오후9시30분에 방후손 유권 올림 

2010년 10월 문경공 할아버지 묘역 앞에서.....금년에 사진을 찍을수가 없어 옛 사진을 올린것입니다. 

상기 사진은 고려국(高麗國)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중찬(僉議中贊) 문경공(文敬公) 허공(許公} 휘(諱) 공(珙) 신도석표(神道石表) 라고 새겨져 있다.
위쪽은 작업현장은 2010년도 마지막 4기 묘가 어느분이신가 확인 하기위하여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파묘후 묘역을 정비하는 영상 입니다.

문경공 할아버지 신도비 전면 후면 좌우측에는 당시 신도비를 세우신 기록문들이 좌측에는 친인척들의 휘자 교산 허균,허진,수색공 허적의 명단과 우측에는 외가댁 이원익,이항복의 휘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고. 미수공께서는 완평부원군 전주이씨 오리 이원익의 손녀 사위 이시기도 하다.후면 신도비는 명 만력39년에 세웠다고 기록 되있다. 비문이 희미하여 대충 본 기억으로 올림니다. 또한 우측에는  호는  필운(弼雲).백사(白沙).동강(東岡) 경주이씨  이항복의 이름도 새겨져 있고 이항복 명종10년1556~1618))은 영의정 권철의 아들 도원수 권율 장군의 사위 이기도 하다.
당시 좌우측과 후면의 기록을 사진으로 담지를 못하여 아쉽다.

옛 사진이지만 섭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추억 삼아서 올려 봅니다.

참고문헌
이원익(李元翼)
공려(公勵), 오리(梧里), 문충(文忠)
1547년(명종 2)
사망일
1634년(인조 12)
본관
전주(全州)
저작
오리집
경력
성균관전적, 형조좌랑, 정언, 지평, 동부승지, 안주목사, 형조참판, 지의금부사,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관련사건
임진왜란
출생일  1547년(명종 2)
사망일  1634년(인조 12)
본관   전주(全州)
저작 오리집
경력

성균관전적, 형조좌랑, 정언, 지평, 동부승지, 안주목사, 형조참판, 지의금부사,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관련사건  임진왜란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한성부 출신. 태종의 아들 익녕군(益寧君)이치(李礻+多)의 4세손이며, 수천군(秀泉君)이정은(李貞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청기수(靑杞守) 이표(李彪)이다. 아버지는 함천성(咸川正) 이억재(李億載)이며, 어머니는 감찰 정치(鄭錙)의 딸이다. 강서(姜緖)·조충남(趙忠男) 등과 교유하였다. 키가 작아 키작은 재상으로 널리 불렸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세에 동학(東學)주 01)에 들어가 수학해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9년(선조 2)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이듬해 승문원권지부정자로 활동하였다. 사람과 번잡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외출도 잘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한다. 유성룡(柳成龍)이 일찍부터 이원익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정자·저작 겸봉상직장을 거쳐 1573년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며, 그 해 2월 성절사 권덕여(權德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 뒤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거쳐 이듬 해 가을 황해도도사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 병적(兵籍)을 정비하면서 실력을 발휘, 특히 이이(李珥)에게 인정되어 여러 차례 중앙관으로 천거되었다.
1575년 가을 정언이 되어 중앙관으로 올라온 뒤, 지평·헌납·장령·수찬·교리·경연강독관·응교·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83년 우부승지 때 도승지 박근원(朴謹元)과 영의정 박순(朴淳)의 사이가 좋지 않자 왕자사부 하락(河洛)이 승정원을 탄핵하였다.
다른 승지들은 도승지와 영의정의 불화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화를 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원익은 동료를 희생시키고 자신만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상주해 파면되어 5년간 야인으로 있었다.
그 뒤 1587년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의 추천으로 안주목사에 기용되어, 양곡 1만여 석을 청해 기민을 구호하고 종곡(種穀)을 나누어주어 생업을 안정시켰다. 또, 병졸들의 훈련 근무도 연 4차 입번(入番)하던 제도를 6번제로 고쳐 시행하였다.
이는 군병을 넷으로 나누어 1년에 3개월씩 근무하게 하던 것을 1년에 2개월씩으로 고쳐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킨 것이다. 이 6번 입번제도는 그 뒤 순찰사 윤두수(尹斗壽)의 건의로 전국적인 병제로 정해졌다.
그리고 뽕을 심어 누에 칠 줄을 몰랐던 안주 지방에 이원익이 권장해 심어 백성들로부터 이공상(李公桑)주 02)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한다.
그 뒤 임진왜란 전까지 형조참판·대사헌·호조와 예조판서·이조판서 겸 도총관·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사의 직무를 띠고 먼저 평안도로 향했고, 선조도 평양으로 파천했으나 평양마저 위태롭자 영변으로 옮겼다.
이 때 평양 수비군이 겨우 3,000여 명으로서, 당시 총사령관 김명원(金命元)의 군통솔이 잘 안되고 군기가 문란함을 보고, 먼저 당하에 내려가 김명원을 원수(元帥)의 예로 대해 군의 질서를 확립하였다.
평양이 함락되자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왜병 토벌에 전공을 세웠다. 1593년 정월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해 평양을 탈환한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되었고, 선조가 환도한 뒤에도 평양에 남아서 군병을 관리하였다. 1595년 우의정 겸 4도체찰사로 임명되었으나, 주로 영남체찰사영에서 일하였다.
이 때 명나라의 정응태(丁應泰)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중상모략한 사건이 발생해 조정에서 명나라에 보낼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를 인선하자, 당시 영의정 유성룡에게 “내 비록 노쇠했으나 아직도 갈 수는 있다. 다만 학식이나 언변은 기대하지 말라.” 하고 자원하였다. 그러나 정응태의 방해로 소임을 완수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선조로부터 많은 위로와 칭찬을 받고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이첨(李爾瞻) 일당이 유성룡을 공격해 정도(正道)를 지켜온 인물들이 내몰림을 당하자 상소하고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 뒤 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가 그 해 9월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이 때 정영국(鄭榮國)과 채겸길(蔡謙吉)이 홍여순(洪汝諄)·임국로(任國老)를 두둔하면서 조정 대신을 공격하자 당파의 폐해로 여기고 이의 근절을 요구했고, 또 선조의 양위(讓位)주 03)를 극력 반대하고 영상직을 물러났다.
1600년 다시 좌의정을 거쳐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영남 지방과 서북 지방을 순무하고 돌아왔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즉위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을 때 전쟁 복구와 민생 안정책으로 국민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호조참의 한백겸(韓百謙)이 건의한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지방에 한해 실시해 토지 1결(結)당 16두(斗)의 쌀을 공세(貢稅)로 바치도록 하였다.
광해군이 난폭해지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비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여색에 대한 근신, 국가 재정의 절검 등을 극언으로 간쟁했고, 임해군(臨海君)의 처형에 극력 반대하다 실현되지 못하자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정조(鄭造)·윤인(尹宎) 등이 대비폐위론을 주장하자,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극렬한 어구로 상소해 홍천으로 유배되었으며 뒤에 여주로 이배되었다.
1623년(인조 1)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제일 먼저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았다.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인조에게 자신이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지냈으니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면 자신도 떠나야 한다는 말로 설복해 광해군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80세에 가까운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도체찰사로 세자를 호위해 전주로 갔다가 강화도로 와서 왕을 호위했으며, 서울로 환도하자 훈련도감제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고령으로 체력이 약해져 사직을 청하고 낙향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성품이 소박하고 단조로워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집은 두어 칸 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 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했다 한다. 인조로부터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저서로는 『오리집(梧里集)』·『속오리집(續梧里集)』·『오리일기(梧里日記)』 등이 있으며, 가사로 「고공답주인가(雇貢答主人歌)」가 있다.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주석
집필 (1997년)   김성균

이항복

생애 및 활동사항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군되어 이항복이나 백사보다는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죽마고우인 한음 이덕형(李德馨)과의 기지와 작희(作戱)에 얽힌 많은 이야기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소년시절에는 부랑배의 우두머리로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으나 어머니의 교훈으로 학업에 열중했다 한다. 1571년(선조 4)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영의정 권철(權轍)의 아들인 권율(權慄)의 사위가 되었다.
1575년 진사 초시에 오르고 1580년(선조 13)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듬 해 예문관검열이 되었을 때 마침 선조의 『강목(綱目)』 강연(講筵)이 있었는데, 고문을 천거하라는 왕명에 따라 이이(李珥)에 의해 이덕형 등과 함께 5명이 천거되어 한림에 오르고, 내장고(內藏庫)의 『강목』 한 질씩이 하사되고 옥당에 들어갔다. 1583년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었다.
그 뒤 옥당의 정자·저작·박사, 예문관봉교·성균관 전적과 사간원의 정언 겸 지제교·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 예조정랑 때 발생한 역모사건에 문사낭청(問事郎廳)으로 친국에 참여해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신료 사이에 비난이나 분쟁이 있을 때 삼사에 출입해 이를 중재하고 시비를 공평히 판단, 무마해 덕을 입은 사람도 많았다.
한편, 파당을 조성하는 대사간 이발(李潑)을 공박하다가 비난을 받고 세 차례나 사직하려 했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고 특명으로 옥당에 머물게 한 적도 있었다. 그 뒤 응교·검상·사인·전한·직제학·우승지를 거쳐 1590년 호조참의가 되었고,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이듬 해 정철(鄭澈)의 논죄가 있자 사람들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정철을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좌승지의 신분으로 날마다 찾아가 담화를 계속해 정철사건의 처리를 태만히 했다는 공격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되고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이 때 대간의 공격이 심했으나 대사헌 이원익(李元翼)의 적극적인 비호로 진정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무사히 호위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 동안 이조참판으로 오성군에 봉해졌고, 이어 형조판서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다. 곧이어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지경연사·지춘추관사·동지성균관사·세자좌부빈객·병조판서 겸 주사대장(舟師大將)·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의정부우참찬에 승진되었다.
이 동안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것을 건의했고 윤승훈(尹承勳)을 해로로 호남지방에 보내 근왕병을 일으켰다. 선조가 의주에 머무르면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며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황응양(黃應暘)을 조사차 보냈다. 이에 그가 일본이 보내온 문서를 내보여 의혹이 풀려 마침내 구원병이 파견되었다.
그리하여 만주 주둔군 조승훈(祖承訓)·사유(史儒)의 3,000 병력이 왔으나 패전하자, 다시 중국에 사신을 보내 대병력으로 구원해줄 것을 청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이여송(李如松)의 대병력이 들어와 평양을 탈환하고, 이어 서울을 탈환, 환도하였다. 다음 해 선조가 세자를 남쪽에 보내 분조(分朝)를 설치해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무를 맡아보게 했을 때 대사마(大司馬)로서 세자를 받들어 보필하였다.
1594년 봄 전라도에서 송유진(宋儒眞)의 반란이 일어나자 여러 관료들이 세자와 함께 환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반란군 진압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상소해 이를 중단시키고 반란을 곧 진압하였다.
그는 병조판서·이조판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며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명나라 사신 양방형(楊邦亨)과 양호(楊鎬) 등도 존경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던 능란한 외교가이기도 하였다.
1598년 우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올랐다. 이 때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가 동료 사신인 경략(經略) 양호를 무고한 사건이 발생하자, 우의정으로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가 되어 부사(副使) 이정구(李廷龜)와 함께 명나라에 가 소임을 마치고 돌아와 토지와 재물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그 뒤 문홍도(文弘道)가 휴전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유성룡(柳成龍)을 탄핵하자, 자신도 함께 휴전에 동조했다고 자진해 사의를 표명하고 병을 구실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에서 도원수 겸 체찰사에 임명하자, 남도 각지를 돌며 민심을 선무, 수습하고 안민방해책(安民防海策) 16조를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1600년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사, 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고 다음 해 호종1등공신(扈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다. 1602년정인홍(鄭仁弘)·문경호(文景虎) 등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 살해하려 한 장본인이 성혼(成渾)이라고 발설하자 삼사에서 성혼을 공격하였다. 이에 성혼을 비호하고 나섰다가 정철의 편당으로 몰려 영의정에서 자진사퇴하였다.
1608년 다시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이 해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해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는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의 살해 음모에 반대하다가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그 뒤 성균관 유생들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배향을 반대한 정인홍의 처벌을 요구했다가 도리어 구금되어 권당(捲堂)주 01)하는 사태가 생기자, 그가 겨우 광해군을 설득, 무마해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정인홍 일당의 원한과 공격을 더욱 받게 되었다.
곧이어 북인 세력이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 일가의 멸문,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살해 등 흉계를 자행하자 그의 항쟁 또한 극렬해 원망의 표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1613년(광해군 5) 인재 천거를 잘못했다는 구실로 이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 별장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새로 짓고 동강노인(東岡老人)으로 자칭하면서 지냈다. 이 때 광해군은 정인홍 일파의 격렬한 파직 처벌의 요구를 누르고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을 옮기게 하였다.
1617년 인목대비 김씨(仁穆大妃金氏)가 서궁(西宮)주 02)에 유폐되고, 이어 폐위해 평민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에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은 해에 관작이 회복되고 이 해 8월 고향 포천에 예장되었다.
죽은 뒤 포천과 북청에 사당을 세워 제향했으며 1659년(효종 10)에는 화산서원(花山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746년(영조 22)에는 승지 이종적(李宗迪)을 보내 영당(影堂)에 제사를 올리고 후손을 관직에 등용시키는 은전이 있었다. 1832년(순조 32)에는 임진왜란 발발 네 번째 회갑을 맞아 제향이 베풀어졌다. 1838년(헌종 4)에는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의 요청으로 봉사손(奉祀孫)의 관리 등용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이정구는 그를 평하기를 “그가 관작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서 당색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면서 기품과 인격을 칭송하기도 하였다.
저술로는 1622년에 간행된 『사례훈몽(四禮訓蒙)』 1권과 『주소계의(奏疏啓議)』 각 2권, 『노사영언(魯史零言)』 15권과 시문 등이 있으며, 이순신(李舜臣)충렬묘비문을 찬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주석
주01 동맹휴학
주02 경운궁. 곧 덕수궁
집필 (1997년) 김성균  출처:한국학 중앙 연구원.....일부편집

 2010년도 당시에도 문경공 할아버지 묘소 봉분이 금년보다 잡초가  더많이 있어 보입니다.

금년에 예초기로 금초하시노라고 고생 하신분들에게 감사말씀을 올림니다.
합천공파 두분 성명을 알수없어 기재를 못했습니다,교위공파 허억님 .여러종친님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조상님들의 은총 가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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