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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분류 : 조선 | ||
ㆍ세수(世數) : 19 | ||
ㆍ 청백리 : 명종조 |
청백리 허세린(淸白吏 許世麟)은 시조로부터 19세손이다. 1507년(중종2) ~ 1579년(선조12). 공은 장대(長大)하여 활쏘기를 좋아하더니 1528년(중종23년) 10월 중종이 영릉(英陵)에 행차하여 문.무과시가(文.武科試) 있어 이때 무과에 합격하였다. 1548년(명종3)에 강진(康津)현감과 1552년(명종7) 청도(淸道)군수로 있으면서 흉년으로 고생하는 군민 구휼(救恤)에 진력(盡力)한 공로로 당상(堂上)으로 특승되어 김해부사(金海府使)로 나갔다. 부사가 되어서도 정사(政事)에 청렴(淸廉)하기가 한결 같았다. 1556년(명종11) 경상우도 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로 전임하게 되자 관민(官民)이 모두 나와 영문앞에 모여 3일간이나 횃불을 밝히고 유임(留任)을 호소(呼訴)하며 전임을 아쉬워 하였다. 1558년(명종13) 길주목사(吉州牧使), 1561년(명종16년)청홍도 수사(淸洪道水使), 1562년(명종17) 청홍도병사(淸洪道兵使)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1564년(명종19)에는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자청하였다. 그해 8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복상(服喪)중 경상좌도병사(慶尙左道兵使)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66년(명종21)에는 회령부사(會寧府使), 1567년(명종22)에 함북병사(咸北兵使)로 전임될 즈음에 이르러 돌아가신 아버지,조부,증조(曾祖)까지 추증(追贈)하는 영광을 얻어 충(忠)과 효(孝)를 다하였다. 공은 평생을 진실로 옳고 곧은 적선(積善)을 다한 청백리(淸白吏)였다. 안타까운것은 후사(後嗣)가 없어 매부(妹夫) 변봉희(邊鳳憙)의 아들 변계허(邊繼許)를 양자하였고 그 후 양천군 지손인 20세 공조참의 허감(工曹參議 許鑑)의 후계(後繼)로 입적(入籍), 유택보존(幽宅保存),수호봉사(守護奉祀)하고 있다. 공은 지극히 어질어 관리로 들고남에 청렴을 본보기로 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니 고을마다 선정비가 세워져 그 이름이 드높았다. 아버지는 사온서주부 허은(司醞署主簿 許誾)이고 어머니는 충주안씨(忠州安氏)이며 배위는 의성김씨(義城金氏)와 전의이씨(全義李氏) 두분이다. 묘는 여주 길천면 구루골 산 정상이었으나 1999년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추곡리 태화산 남쪽아래로 천묘하였다. *청백리(淸白吏) : 조선 시대에, 의정부·육조 및 경조의 2품 이상의 당상관과, 사헌부·사간원의 우두머리가 천거하여 의정부에서 뽑았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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