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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분류 : 조선 | ||
ㆍ세수(世數) : 20 |
1568년(선조 1)∼1634년(인조12) 조선 중기의 문신. 시조로부터 20세손. 자는 중구(仲久), 호는 고산(孤山). 별좌(別坐) 사익(思益)의 아들이며 양안공 형손(亨孫)의 5세손이다. 배위는 종실이씨(宗室李氏) 양성군 이륜(李倫)의 따님이다. 1601년(선조34) 진사(進士)에 입격하여 현관(賢關)으로서 경릉참봉에 천보되었고 종묘서(宗廟署)와 의영고(義盈庫)의 봉사(奉事) 및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을 역임하였으며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을 겪었다. 공은 이를 분통히 여겨 벼슬을 떠나 고산(孤山)이라 자호(自號)하고 여생을 보내려 했으나 세자시강원의 관료들이 춘추(春秋)를 해석하는 자가 드물어서 공이 천거되었으며 문학(文學)으로 전임되었으니 이는 공이 경학(經學)으로 명망이 높았음이다. 1620년 사서를 거쳐 문학이 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옥천군수로서 왕을 호위하였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화로 왕을 호종(扈從)하였다. 공은 이공으로 통정(通政)으로 승진하였다. 한때 등극사(登極使) 권반(權盼)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었고, 이듬해 가례도감(家禮都監)의 상례(相禮)를 지내고 벼슬이 올라 좌승지가 되었다. 직언으로 왕의 비위를 거슬러 청송부사로 좌천되었다. 임기를 마친뒤 남원에 돌아와 최행과 더불어 안동향규(安東鄕規)를 본떠서 남원읍규(邑規)를 만들어 시행하였다. 양천세고에 15편의 시가 있다. 효종 때 도승지(都承旨)로 증직(贈職)되었다.(디지털남원문화대전) 묘는 남원시 주천면 신촌리 산49번지이며 묘비가 있다. *정묘호란(丁卯胡亂) : 1627년(인조 5) 만주에 본거를 둔 후금(後金:淸)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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