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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난설헌(許蘭雪軒)
ㆍ분류 : 조선  
ㆍ  키워드   :  #1
ㆍ세수(世數) :  21
허난설헌(許蘭雪軒) 허초희(許楚姬)
21세손 / 문장가 (난설헌집) / 서화가 (앙간비금도) 
 
  
허난설헌 초상

 
앙간비금도 
 
 
허난설헌 묘
ⓒ blog.daum.net/psy1212
  
1563년(명종 18)∼1589년(선조 2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명은 초희(楚姬). 시조로부터 21세손이다. 자는 경번(景樊)이고 호는 난설헌(蘭雪軒)이다.

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초당(草堂) 허엽(許曄)이고, 어머니는 정부인 강릉김씨(江陵金氏)이다. 허봉(許篈)의 동생이며 허균(許筠)의 누님이다. 아버지가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 강릉김씨(江陵金氏) 광철(光轍)의 딸을 재취하여 봉,·초희,·균 3남매를 두었다.

15세(1577)에 안동김씨(安東金氏)의 김성립(金誠立)에게 시집갔다. 김성립(金誠立)의 자는 여견(汝見),호는 서당(西堂)으로 기축년(1589년) 증광시에 문과 병과로 급제하고 벼슬은 홍문관 정자(正字)에 그쳤다.

난설헌은 강릉시 초당동 475-3번지에서 태어나 7세무렵까지 살면서 이웃인 사천면 화평리164번지에 있는 외가(외조부=김광철)를 오가며 유년기를 보냈고 15세에 시집갈 때까지 문학의 수학기를 거쳤다.
 
일찍이 시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 했으며 남편과의 금슬이 원만하지 못한데다 친정의 겹친 화액(禍厄)에 따른 고뇌(苦惱)를 시작(詩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로 여인의 특유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哀傷的)인 시풍의 독특한 시세계(詩世界)를 이룩했다.
 
그의 작품 일부를 동생 균(筠)이 명나라 사신이며 시인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줌으로써 중국에서 시집(詩集) [난설헌집(蘭雪軒集)]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으며 1711년에는 분다이야(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애송되었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될 만큼 신선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묘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산 29-5 경수마을뒷산 안동김씨 선영(先塋)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장가/
[난설헌집]과 국한문가사인 [규원가 閨怨歌]
[봉선화가 鳳仙花歌]가 있다.


 





 [자료 글 #1]
쓸쓸함이 꽃잎처럼 떨어지는 허난설헌 생가터에서...
출처 그래도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 느림보
원문 http://slowalker.net/130029645361 


 


살아생전 인정받지 못하고,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 그녀를 만나러 갔더랬다.
 
  
 
비교적 넉넉한 공간을 가지고 쌓아진 담이 인상적인 이 집은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안채와 사랑채, 부속채인 대문간채가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는 건물로,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화강석을 깍아만든 기단위에 'ㄱ'자형 사랑채가 세워져 있고, 사랑채의 담 너머로 'ㅁ'자형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너무 넓어 훵하게 보일법한 마당 안에는 화려하진 않지만 짜임새있게 꾸며진 정원이 자리잡고 있어, 단조로움을 피하면서도 집안 전체에 운치를 더해준다.  또한 집 전체를 송림이 둘러싸고 있어, 전형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바로 이곳에서 조선 선조때의 문신 허엽이 한때 살았으며, 그의 딸 허난설헌이 태어났다.
 
  
 
불우한 생애를 지낸 난설헌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시집가기전만 해도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꿈많던 소녀였다.
 
난설헌의 아버지인 허엽은 지금으로 말하면 세속에 얽매이지 않은 진보적인 사람이었던 듯하다. 그의 아들 허봉, 허균과 더불어 난설헌도 아들들과 똑같은 교육을 시켰다. 이는 궁중의 공주들에게도 한글만 가르킨 후 아녀자의 도리만을 교육할 정도로 아녀자의 글공부를 타부시하던 당시 풍속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남녀평등을 일찌기 몸소 실천한 지성인이자 선각자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허엽의 생각과 행동은 허봉, 허균은 물론 난설헌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것이 틀림없다.

허봉은 일찍부터 여동생인 난설헌의 재주가 천부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친구였던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唐詩의 대가 손곡 이달에게 난설헌의 詩 교육을 부탁했다. 명문가의 자제가 서얼출신(이달)과 사심없이 교우한다는 것도 특이할 일인데, 여성의 교육을 타부시 했음은 물론, 안팎의 구분이 확연했던 시절에 난설헌의 천부적 재주를 키워주기 위하여 이달에게 교육을 부탁했다는 사실은 왠만한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진보적인 행동이었다.

허균은 말할것도 없다.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조선 최초로 천주교 신자가 되어 돌아온 것은 물론이요, 서얼문제나 탐관오리의 횡포, 이상향의 건설등의 내용을 담은 사회비판소설이자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집필하지 아니했던가.
허난설헌 또한 가난한 여성의 삶과 사회모순 비판의 시를 남겼더랬다.
 
  
 
여하한 이러한 친정가문의 진보적이고 남녀평등적 분위기는 난설헌에게 더없이 좋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그녀의 천부적 재능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난설헌은 이미 8세에 광한전백옥문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라는 글을 지었다 한다. 당대의 명필 한석봉이 이 글을 글씨로 써서 남겼으며, 명나라의 유명한 문인 조문기가 이 글을 읽고 절찬했다 하니 그녀의 천재성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물론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선 허균과 이재영이 지은 것이라고 했고, 김만중의 '서포만필'에서는 허균이 원나라와 명나라의 글귀를 짜집기 해서만든 표절작품이라는 반론도 있었다. 혹자는 글의 완숙함이나 내용으로 보아 난설헌이 8세때 지은것이 아니라 만년기에 완성한 작품일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이런 내용들이 규방의 여인네가 글 짓는 것을 타부시한 사대부 학자들의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행여 사실일지라도, 허엽이 딸인 난설헌의 천재적인 재능이 오히려 두려워, 글을 가르키면서도 가르키는 것을 꺼려했다는 얘기나 허봉, 허균의 누이에 대한 이야기로 보아 난설헌이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난설헌의 행복은 그녀의 나이 15세 때, 김성립에게 시집을 간 후부터 산산이 깨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난설헌이 그녀의 남편 김성립과 거리가 멀었던 것은 아니었다.
 
秋 淨 長 湖 碧 玉 流    맑은 가을 긴 호수에 옥같은 물 흐르는데
蓮 花 深 處 繫 蘭 舟    연못 무성한 곳에 목란배를 띄웠다네
逢 郞 隔 水 投 蓮 子    임 만나 물건너로 연밥을 던지다가
或 被 人 知 半 日 羞    남의 눈에 띄었을까 반나절 무안했네
 
난설헌의 채련곡((採蓮曲)이다.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혼 초기엔 수줍은 새색시 허난설헌의  남편에 대한 사랑과 기대가 두터웠음을 알수 있다. 한데 당시 남녀관계에 있어서 소극적인 것이 미덕이라 여겨진 사대부 규방에서의 예의범절과는 달리, 사랑하는 님이 물건너 보이자 연밥을 툭 던져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는(이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고백이다) 대범한 행위는 난설헌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면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과 기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 김성립은 연달아 과거에 낙방하면서부터 아내의 재주를 시기하기 시작하더니, 점차 아내를 멀리 하고 공부도 등한시하며 밖으로만 맴돌았다. 게다가 시어머니와의 사이도 원만치 않았다. 시어머니쪽에서 보자면, 선대의 명성에 반하여 과거에 자꾸 낙방하는 아들과는 달리, 규방 처자의 글쓰기를 타부시했던 당시에 살림보다는 글쓰는 것을 좋아한 재능있는 며느리가 예뻐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잘난 며느리 때문에 아들의 과거 운이 없는 것이라 여겼을 수도 있겠고.
 
이런 상황속에서 난설헌에게 유일하게 힘이 되어준 것은 그녀가 낳은 두 아이와 詩作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객사 이후에 그녀의 친정은 기울기 시작하였고, 그녀에게 힘이 되어준 두 아이를 연거퍼 잃고난 후, 그녀나이 스물여섯에 정신적 지주였던 친정오빠 허봉마저 세상을 떠돌다 객사하고 만다. 그녀는 오빠가 세상을 떠난 후,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듯한 시를 썼다 한다.
 
碧 海 浸 瑤 海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 鸞 倚 彩 鸞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 蓉 三 九 朶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 墮 月 霜 寒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허경진 譯)
      
그리고 스물일곱이라는 꽃다운 나이의 어느날,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는 집안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하고는 눈을 감았다 한다. (난설헌은 3월 19일에 눈을 감았으며, 3*9는 27이니 그녀의 나이가 된다.) 그녀의 유언에 의하여 그녀의 모든 유품(집 한칸에 가득 쌓일 정도로 많았다던 작품까지 포함하여)은 불교식으로 모두 불태워졌으니, 그녀의 열꽃같던 인생이 소진할 때 그녀의 모든것이라 할 수 있던 그녀의 작품도 활활 타올라 소멸한 것이다.
 
  
 
허난설헌 생가터 옆에는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엔 허균의 생애와 사상, 저서, 작품등이 소개*전시되고 있음과 동시에 난설헌의 생애와 작품 역시 허균과 대등하게 소개*전시되고 있다. 허난설헌은 꽃다운 나이에 요절하고 난 뒤에야 세상에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 친정오라비인 허균의 공이었다. 사실 난설헌의 대부분 작품은 그녀의 유언에 의하여 모두 불태워졌지만, 허균은 누이의 작품이 너무 아까워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누이의 작품과 기억하고 있던 작품들을 추려 모았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지원군과 함께 온 명나라 사신 '주지번'에게 작품 일부를 주었다.
 
주지번은 이 시가 무척 훌륭하다 하며 중국으로 돌아가 시집 '난설헌집'을 간행했고, '난설헌집'때문에 종이가 모자랄 지경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격찬을 받으며 인기를 끌었다 한다. 그 후,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올때마다 난설헌의 시를 얻기 위해 허균의 집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니, 그녀가 중국에서 얼마나 선풍적 인기를 누렸는지 알 수 있겠다. 그리고 18세기 초반에는 일본에서도 난설헌의 시집이 번역되어 널리 애송되었다 하니,허난설헌이야말로 최초의 한류스타였던 셈이다.
 
  
 
중국에서 얻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이 조선에 역출간된 해는 100년도 더 지난 후였다 한다.
그러나 살아생전 조선에서의 삶이 고달팠듯, 조선에서 출간된 난설헌의 작품집은 찬사 대신 수많은 비판을 받아야 했다. 품행이 방정해야 할 규방여인이 점잖치 못하게 남녀간의 연애시나 썼다는 이유에서였다. 심지어는 깨인 학자라 일컬어 지는 연암 박지원마저 세계 최고수준의 기행문이라 요즘 각광받고 있는 '열하일기'에서 난설헌에 대하여 이렇게 평하였다.
 
[규중여인이 시를 짓는다는 것이 원래부터 좋은 일은 아니다.
조선의 한 여자이름이 중국에까지 퍼졌으니 대단히 유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부인들은 일찍이 이름이나 자를 찾아볼 수 없으니,
난설헌의 호 하나만으로 과분한 일이다.
후에 재능있는 여자들이 이를 밝혀 경계의 거울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세대가 한참 지난 후의 평가도 이랬을진데, 난설헌이 살았을 때 그녀의 삶은 얼마나 고달펐겠는가? 가정적으로는 불화였으며, 천부적 재능으로 글을 써도 열린 공간에서 평가받을 기회는 커녕 글을 쓴다는 자체가 타부시되었으니까. 하여 그녀는 살아생전 세가지 한을 품고 살았다 한다. 첫째는 이 넓은 세상에 하필 조선에 태어났는가,  둘째는 왜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났는가,  세번째는 왜 수많은 남자 가운데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남녀 차별을 받지 않고 교육을 받은 그녀에게,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열린 공간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칠 기회조차 허락치 않던 당시의 사회는 자유로운 정신을 옥죄는 족쇄와 다름없었다.
 
人 言 江 南 樂   사람은 강남의 즐거움을 말하나
我 見 江 南 愁   나는 강남의 근심을 보고있네
年 年 沙 浦 口   해마다 이 포구에서
腸 斷 望 歸 舟   애타게 떠나는 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이  강남곡(江南曲)은 얼뜻보면 님을 떠나보낸 심정을 노래한 듯하지만,  실은 떠나가는 배처럼 자유롭고 싶으나 얽매인 자신의 현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작품은 흔히 남녀간의 사랑을 주로 노래하였다고만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녀의 작품을 폄하하던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뿌리깊은 오해이다. 우선 그녀에게는 그 내용이 남녀간의 사랑시이건 아니건을 떠나서, 시를 쓴다는 행위 자체가 여성의 글쓰기를 금기시한 모순된 사회에 대한 저항이자 탈출구였다. 그녀의 시 대부분이 노장사상의 색채가 묻어나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일 것이다. 그렇다고 노장사상에 빠져 개인적 현실의 도피에만 천착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시는 현실비판의 수단이었다.
 
手 把 金 剪 刀   손으로 쇠붙이 가위와 바늘을 잡으니,
夜 寒 十 指 直   추운 밤에 열 손가락이 빳빳해지누나,
爲 人 作 嫁 衣   남의 시집갈 옷은 지어 주지만
年 秊 還 獨 宿   해마다 나는 홀로 텅 빈 방만 지킬 뿐이네
 
재능있는 여성으로서 조선사회에서 겪고있는 자신의 개인적 모순은 타인에게로 확대된다. 사실 난설헌의 삶이 고달펐다지만, 그 고단함은 가난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부유하면 부유했지 평생 가난을 모르고 살았을 그녀가 빈자의 삶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더욱 확대 되어 '남 시집갈 옷을 손가락 굳을 정도로 지어주며 일해도, 정작 자신은 여전히 시집가기 힘든 현실'인  사회적 모순으로 확대된다. 뿐만 아니라 이 시에서는 여성의 불평등한 사회적 지위가 비참하게 가난한 자의 삶과 다를바 없다는 그녀의 의식도 은연중 드러나고 있다.
난설헌의 사회에 대한 비판은 더욱 노골적으로 발전한다.
 
양반가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
높은 다락에서 풍악소리 울렸지만
가난한 이웃들은 헐벗고 굶주려
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러졌네
어느날 아침 높은 권세 기울면
오히려 북쪽 이웃을 부러워하리니
흥하고 망하는 것은 바뀌어도
하늘의 도리를 벗어나지는 못한다오
 
그녀는 규방여인임에도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남녀상열지사'를 시로 쓴 여성이 아니라, 시를 통해 조선여성이 처한 사회적 불평등은 물론 사회적 모순을 적극적으로 지적한, 세대를 앞서도 한참 앞선 선각자였던 것이다.
 

 허난설헌이 직접 글을 쓰고 그린 앙간비금도를 보자.
 
아버지와 딸이 하늘을 나는 새를 바라보고 있다. 조선시대 문인화에 있어서, 여자가 그림에 등장하는 예는 극히 희귀하다 한다. 이 난설헌의 그림은 아마도 최초로 사내아이가 아닌 여자 아이가 그림에 등장한 그림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학자들은 저 창공을 자유로이 나는 새들을 보고 있는 여자 아이가 난설헌 자신을 형상화한 것이라 추측한다.

조선 중기까지 우리의 그림은 대부분 화보풍의 산수를 그린데 비해 난설헌의 이 앙간비금도에는 주변의 실경이 등장하고 있어, 조선후기에야 나타난 진경산수화나 풍속화보다 오히려 선구적인 면이 있다.
 
문인화에 남자가 아닌 여자아이를 넣은 획기적 사항은 그렇다 치고, 그림 옆에 써진 난설헌의 글씨에 주목해보자. 사람들은 저 글씨체가 여자의 글씨체가 아니라 남성의 글씨처럼 힘이있고 대범함이 엿보인다 한다. 우선은 칭찬인듯한데, 만약 난설헌이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별로 달가워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난설헌이 살며 괴로웠던 이유는 바로 신분의 차별, 재능에 펼치는데 있어서 남녀의 차별에 있었다.
 
난설헌의 글씨는 남자다운 것이 아니라 난설헌만의 개성있는 글씨다. 난설헌이 글씨를 배운 것은 그의 아버지 허집, 그의 오빠인 허봉, 그리고 큰 오라비의 친구이자 자신의 스승이었던 이달에게서였다. 당연히 교육을 담당한 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만약 난설헌이 '여성적'이란 표현에 액자맞춰진 교육환경에서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교육되었다면 그녀의 글씨체도 달라졌을 것이다. 이는 남녀의 역할적 구분이나 학문적 재능이 선천적으로 생태학적인 면에서 기인되는 것이 아니라 학습에 의해서 기인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성의 글씨 = 힘있음, 대범함) : (여성의 글씨 = 부드러움, 섬세함)]이란 공식은 단지 가부장적 사회가 남녀 구분해서 제공한 교육에서 기인한 것일 뿐이다. 난설헌이 죽은지  수세기가 지난 지금도, 저 공식에 얽매여 난설헌의 글씨를 평한다는 것은 아직 우리사회의 헤게모니가 가부장적 사회에 근간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허난설헌의 생가를 돌다보면, 바로 지척에 있는 오죽헌과 신사임당이 비교적으로 자꾸 떠올려진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율곡 & 신사임당과 비교해서 허균 & 허난설헌이 뒤질 것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오죽헌의 율곡과 사임당에 대해서는 열광하면서도 허균과 허난설헌에 대해서는 그저 스쳐지나갈 뿐이다. 홍길동전은 모두 재밌어라 하며 잘 읽고 이해한데 반해 율곡의 격몽요결은 그 책제목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말이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율곡은 자신의 유교이론과 부국강병설을 권력에게 제공했고, 권력은 이를 바탕으로 가부장적 사회를 더욱 확고히 하며 사회지배를 용이하게 해왔으니, 권력에게 있어서 율곡은 성역화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허균은 사회모순 비판과 말년의 반란음모으로 권력에겐 눈에 티끌같은 껄끄러운 대상이자 기피대상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권력에게 있어서 바이러스 같은 인물로 방제의 대상이었다. 이 비교는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난설헌의 이야기야 내내 해왔으니, 난설헌과 상반되는 사임당의 이야기를 해보자.
사임당은 아들없는 가문의 딸로 태어나, 아들잡이 노릇을 하여 친정의 대를 잇기 위해(가부장적 사회의 유지를 위해) 사회적 용인하에 시집살이를 하지 않고 편한 친정살이를 했다. 그녀 또한 천부적 재능이 있어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으나, 사회에 순응하여 신변잡기적인 그림으로 재능을 발휘했다. 솔직히 그녀의 그림이 회화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뛰어나다 하나 그녀의 명성이 이렇게 대단해진 것은 그녀의 아들인 율곡의 명성에 힘입은 바 커서, 그녀 자신이 발휘한 재능(그림)으로보다는 오히려 남편을 잘 보필하고 자식을 잘 키운 현모양처(가부장적 사회의 이상적 여인상)로서 각광받고 있다. 같은 지역에서 나서 비슷한 시대를 살았음에도 이렇듯 상반된 인생을 산 난설헌과 사임당의 인생은 그 족적을 쫓아가는 사람에게 만감을 교차하게 한다. 
 
사실 나는 같은 날 오죽헌과 허난설헌 생가터를 다녀왔는데, 이상한 점 한가지를 발견하였다. 오죽헌은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고,  벌써 홍매와 산수유와 진달래등 봄꽃이 만발한데 비하여 오죽헌에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난설헌의 생가터엔 인적도 찾아보기 힘들고 아직 꽃한송이 피어있지 않아 겨울이 그대로 남아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난설헌의 생가터는 대분밖에 '난설헌 생가터'라는 표식만 있을 뿐, 건물 내엔 난설헌의 시한편 걸려있지 않아 난설헌의 생가임을 연상케하는 그 무엇도 존재치 않았다.

난설헌 사후, 그의 오빠 허균이 반란에 연루되어 사형당하고 그의 집안 재산이 모두 몰수었던 역사적 사실과 연계해서, 현재 그 생가터의 고택도 허씨집안의 것이 아닌 이씨집안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 해도, 아름다운 집에 사람이 없음은 꽃에 벌나비가 날아오지 않음과 같아, 더욱 쓸쓸함과 적막감을 더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역설적이게도 이 집의 적막함은 고단하고 불우한 삶을 살았던 허난설헌의 생애와 맞아떨어져 오히려 난설헌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했으니 참으로 묘한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수없는 반대와 논란이 있었음에도 최근 신사임당은 새로 발행될 오만원짜리 액면가 신권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 한데 똑같이 천부적 재능을 지녔고, 오히려 예술적으로 더욱 많은 업적을 쌓았으며, 해외적인 명성도 자자한 허난설헌은 인물도안 후보명단에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사임당의 능력과 업적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단지 화폐도안인물 선정 과정에서,  사임당의 업적이 지폐 인물도안에 오를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냐와 사임당이 현대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선정될만한 위치에 있냐의 논란이 있었고, 이 논란 끝에 사임당이 도안 인물로 결정된 사실은 우리사회에서 여전히 가부장적 사회권력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난설헌은 이리 될 자신의 처지를 예측하고 있었고, 자신이 인정받을 날은 아직도 멀고도 멀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택에는 낮에도 사람이 없어
뽕나무에는 부엉이와 올빼미만 우네
옥섬돌엔 차가운 이끼와 넝쿨만 무성하고
빈 누각엔 새들만 깃들이네
지난 날 수레와 마차 오가던 곳인데
지금은 토끼 언덕이 되었네
이제야 알겠구나, 선인의 하신 말씀
부귀는 내가 구할 바가 아니란 것을
 
강릉에 가서 오죽헌을 들를 때, 꼭 한번 허난설헌 생가와 기념관에도 들러, 한많았던 요절한 천재시인 허난설헌을 만나볼 일이다.
 



 

번호     글 제 목 별칭/관직명 세수(世數) 시호(諡號) 봉군(封君) 상신(相臣) 공신(功臣)   청백리   호당(湖堂)   키워드  
61 조선 허교(許喬) 수옹(壽翁) 유악(維嶽) 21
60 조선 허균(許筠) 21
59 조선 허난설헌(許蘭雪軒) 21 #1
58 조선 허봉(許篈) 21 김귀영
57 조선 허방(許邦) 21
56 조선 허성(許筬) 21
55 조선 허적(許적) 21 양릉군 영사1등
54 조선 허계(許禊) 21 양평군 영사2등
53 조선 허한(許僩) 행오(杏塢) 21
52 조선 허겸(許謙) 파주목사(坡州牧使) 21 파릉군
51 조선 허응(許凝) 21 양원군
50 조선 허목(許穆) 22 문정(文正) 우의정
49 조선 허실(許宲) 22
48 조선 허완(許完) 22 충장(忠莊)
47 조선 허욱(許頊) 좌의정 22 정목(貞穆) 양릉군 좌의정 선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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