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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분류 : 조선 | ||
ㆍ세수(世數) : 21 |
21세손 / 문장가 (악록집) / 서화가 / 서예가 ![]() 1548년(명종 3)∼1612년(광해군 4). 시조로부터 21세손. 자는 공언(功彦), 호는 악록(岳麓)·산전(山前).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초당 허엽(許曄)의 아들이며, 허봉(許篈)·허균(許筠)의 형이고,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오빠이다. 당시 이름난 문장가였으며 유희춘(柳希春)의 문인이다. 1568년(선조 1) 생원(生員)이 되고, 158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590년 전적(典籍)으로서 통신사(通信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金誠一)과 일본에 다녀왔다. 이때 통신사인 황윤길(黃允吉)은 일본의 침략의도를 지적했으나 부사(副使)인 김성일(金誠一)은 침략 우려가 없다고 진술하자 김성일과 같은 동인(東人)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견에 반대하고 침략가능성이 있음을 직고(直告)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조좌랑으로 강원도 소모어사(召募御史)를 자청하여 군병모집에 진력하였다. 이어 정언·헌납·이조좌랑·응교·사인·집의를 거쳐, 1594년 이조참의로 승진되었으며, 1595년 대사성,대사간,부제학을 역임하였다. 이어 이조참판을 지내고 전라도안찰사로 나갔다가 예조와 병조의 판서에 제수되었으며, 그뒤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1607년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게 되어 세인들이 고명칠신(顧命七臣)이라 칭하게 되었다. 선조조에 학문과 덕망으로 사림의 촉망을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찬성에 추증되었다. 동생 허봉(許篈) ·허균(許筠) 및 여동생 허난설헌(許蘭雪軒) 등과 함께 당시 이름난 문장가이며, 성리학에도 통달하였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양천허씨 5문장으로 강릉시 초당동에 시비(詩碑)가 있다. 묘는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맹2리에 부친 허엽과 형제인 허봉, 허균과 함께 안장 되어 있다. [저서] : [악록집 岳麓集]. [글씨] : 허엽신도비(許曄神道碑)(龍仁 원삼면 맹리)가 있다. 문장가 *영창대군을 부탁하는 선조(宣祖)의 유교(遺敎)를 받은 고명칠신으로 유명하고 *문장에 능하고 글씨가 명필이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유성룡등과 교류하고 악록집(岳麓集)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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