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허씨대종회 홈페이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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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목(許穆)
ㆍ분류 : 조선  
ㆍ세수(世數) :  22
ㆍ시호(諡號) :  문정(文正)
ㆍ상신(相臣) :  우의정
허목(許穆)
22세손 / 시호는 문정 / 우의정 / 서예가 (전서는 동방의 일인자) / 성리학자
 
  
 
 
미수 허목이 쓴 척주 동해비 원고및 동해송 원고(眉수許穆筆陟州東海碑稿本帖)
조선1661년/32.7×50.0cm/보물592호/국립중앙박물관
http://blog.daum.net/inksarang/16876319
 
 
미수 허목필 동해송 초본 (眉수許穆筆東海頌草本)
조선1661년/21.8×32.7cm/국립중앙박물관
http://blog.daum.net/inksarang/16876319

1595년(선조 28)∼1682년(숙종 8).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시조로부터22세손이다.
자는 문보(文父) 또는 화보(和父) 이고
호는 미수 또는 태령노인(台嶺老人)이다.
나면서 손바닥에 글월문(文)자와 발바닥에 우물정(井)자가
있었다고 하며 눈썹이 길어 눈을 덮었다 하여
호를 미수(眉叟)라고 했다.
1626년(인조4) 유생으로서 동학(東學)의 재임(齋任)을 맡고 있을 때
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啓運宮 具氏)의 복상(服喪)문제와 관련
생부 정원대군(定遠大君)을 왕으로 추숭하려는
인조의 뜻에 부합하여 유신(儒臣) 박지계(朴知誡)가
원종(元宗)의 추숭론(追崇論)을 제창하자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예(禮)를 혼란시킨다고 유적(儒籍)에서 제적(除籍) 하는 벌(罰)을
가하였다.
이에 인조는 그에게 정거(停擧)를 명하였는데 뒤에 벌이 풀렸으나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 하였다.
공은 모계 문위(茅溪 文緯)를 통해 한강 정구(寒岡 鄭逑)에게
사사하여 영남학통(嶺南學統)을 이었으며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전국의 명소와 산천을 주유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으며
지방의 사림(士林)들과 많이 종유했다. 56세 때에 비로소 일천(逸薦)으로 벼슬길에 오른 후
30년간을 관직에 있었으나 타고난 학자적 체질로 행정 또는 정치권력의 직접적 집행보다는
주로 학자로서 또는 왕사(王師)의 입장에서 임금께 군덕(君德)과 시정(時政)에 관한 의견을 올려
치도(治道)가 바로 서게 하는데 주력 했다고 볼 수 있는데 120여 차례의 상소(上疏)와 차자(箚子),
수의(收議)를 비롯하여 옥궤명(玉几銘), 심학도(心學圖) 및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
군덕일신잠(君德日新箴)과 경설(經說), 동사(東事)등을 지어 올린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성호(星湖)는 "조선조 500년 동안에 참으로 대신다운 대신이었다고 평하면서
선생은 조금도 권력에 아부하거나 연연함이 없이 오직 정의를 지키기에 힘썼고
또 마땅히 나아갈 때 나아가고 물러설때 물러서서 진퇴의 본말을 분명히 했으며
또 열심히 옛것을 연구하여 그 진리를 깨우쳤으며 어지러울 때는 욕먹지 않고
절조를 지키며 명분을 살려서 명예에 손상을 입지 않았다" 고 공의 신도비문에 기록하였다.
또 공의 업적 중 뺄 수 없는 것이 예론(禮論)으로서 사실상 당시의 예송(禮訟)은
국헌(國憲)에 관한 문제로 정권과도 관계되는 임금의 체통(體統)에 관한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공은 당대 예이론(禮理論)의 일인자로서 노론(老論)측의 예론과 대립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왕권의 강화를 통한 왕조질서(王朝秩序)의 확립과 벌열세력(閥閱勢力)의 억제를 통한
일반 사대부(士大夫)의 기회 균등을 찾으려는 운동에 연결 되었는데
이로 인해 당화(黨禍)를 입어 시련을 겪었다.
공은 일생 고학(古學)에 침잠하여 육경(六經)을 근본으로 박학(博學)의 세계를 추구하여
우리 실학(實學) 발달의 단초가 되었고 기언(記言), 경례유찬(經禮類纂)등 방대한 저술(著述)로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기는 한편 서화에도 뛰어나 고전(古篆)에 바탕하여 독창(獨創)한 전서(篆書)는
동방제일(東方第一)이라는 평과 더불어 숱한 일화를 낳기도 했는데
삼척의 동해비(東海碑)에 새겨진 동해송(東海頌)과 고문운율(古文韻律)등의 수고본(手稿本)은 
보물로 지정 되어 있다.
공은 포천현감(抱川縣監) 증영의정(贈領議政)인 교(喬)와 정랑(正郞)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따님과의
사이에 장남(長男)으로 서울의 창선방(彰善坊)에서 태어났다.
증조는 동애공 자(東厓公 磁)이고 증조모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증손녀이며
조부는 퇴계(退溪)가 그 학문과 덕망을 기린 송호처사 강(松湖處士 橿)이고
조모는 문량공 강희맹(文良公 姜希孟)의 현손 사용 복(司勇 復)의 따님이다.
9세에 입학하여 교관(敎官)에게 수학하였고 총산 정언옹(蔥山鄭彦옹) 선생에게서
예기와 단궁(檀弓)을 배웠다.
23세에 아버지의 임지인 거창(居昌)으로 따라가 그곳의 모계 문위(茅溪 文緯) 선생을 찾아 문학하고
이어 종형인 관설공 후(觀雪公 厚)와 함께 성주(星州)의 한강 정구(寒岡鄭逑)
선생을 찾아 사사(師事)했다.
30세 때에 경기도 광주의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하면서 원근(遠近)의
많은 학자들과 종유 하였고 이때에 어릴 적부터 배워온 고문전자(古文篆字)의 체격이 완성되었다.
32세 때 동학재임(東學齋任)으로서 유신(儒臣) 박지계(朴知誡)를 유적(儒籍)에서 처벌한 일로
과거를 못보게 하는 왕명(王命)을 받은 뒤 해벌(解罰)이 되었어도 과거를 보지 않았다.
42세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피난한 뒤 모부인이 계시던 의령(宜寧)으로 내려가
사천(泗川),창원(昌原),칠원(柒原) 등지에 10여년간을 우거 하면서
강론(講論)과 저술(著述)을 게을리 하지 않는 한편 지리산 남해안을 유상(遊賞)하고
선세유적(先世遺跡)을 답사 하였다.
56세 되던 정월에 "박학능문(博學能文)하며 그 뜻이 고상(高尙)하다" 는 천목(薦目)으로 추천되어
정릉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되자 모부인(母夫人)이 선상국(先相國:포천공)께서
아들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나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고 하자
공께서도 수긍하고 1개월 만에 그만 두었다.
이후 조정에서는 62세가 되시던 해에 조지서별좌(造紙署別坐),공조정랑(工曹正郞),
용궁현감(龍宮縣監)등에 제수 하였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음해에는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으로
두 차례 제수되자 번번히 사양 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부득이 임금 앞에 나아가 사례하고
사퇴 상소와 함께 군덕정폐소(君德政弊疎)를 올린 다음 연천으로 돌아왔다.
1659년(65세)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 되자 옥궤명(玉几銘)을 지어 올리고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했다.
다음해 현종(顯宗) 원년에는 경연(經筵)에 입시하였고 기해복상(己亥服喪)의 잘못을
추정(追正)하라는 상소를 올리므로써 당시 조정의 실세인 노론(老論)측과 대립하게 되고
이로 인해 삼척부사(三陟府使)의 외직으로 좌천되었으며
2년간의 재임동안 많은 치적과 교화(敎化)를 남기고 연천으로 돌아왔다.
이후 80세에 이르기까지 10여년 동안 동사(東事)를 완성하고 저술을 정리하면서
벗과 제자들을 더불어 산수를 유상(遊賞)하면서 소견하였다.
그러던 중 1675년(숙종1,81세)에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고 이어 비국당상(備局堂上)과
귀후서제조(歸厚署提調)를 겸임하였으며 다시 자헌대부의정부우참찬(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 겸
성균관제주(成均館祭酒)로 특별 승차하고 한달 뒤에는 좌참찬(左參贊)으로 옮겨
경연에 입시하고 곧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옮겼다가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는데
한결같이 부임을 사양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이후 5년에 걸쳐 경연에서 또는 상소와 차자로서 예와 정사와 형벌 임금이 경계 해야 할 일,
오가지패(五家紙牌)와 축성(築城)의 폐해, 세상의 폐단, 정치의 폐단,둔전(屯田)의 철폐,
호포(戶布)제도에 대하여 등의 주장을 펴는 한편 심학도(心學圖),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
군덕일신잠(君德日新箴)과 경설(經說), 동사(東事) 등을 지어 임금께 바치는 등의 많은 업적을 쌓았다.
한편 나라에서는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병이 있을때면 어의(御醫)를 보내 간병케 하는 등
외에도 집을 지어 주는 특별한 예우를 베풀었다.
이는 조선 500 년간 세종이 방촌 황희(尨村 黃喜)에게 인조가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에게
내린 사택(賜宅)과 더불어 세 번 밖에 없는 일이다.
공이 살던 연천의 초가집이 화재로 소실되자 촌가(村家)를 빌려 살고 있음을
전유(傳諭)하러 간 사관(史官)을 통해 전해들은 승지(承旨:李沆)가 조종조(祖宗朝)의
고사를 인용하여 공이 노년을 지낼 거처를 예우 차원에서 마련해 주기를 청하자
숙종이 경기 감사에게 명하여 집을 지어주도록 하였는 바 그 구조는 사랑채와 안채 및
별묘(사당)로 되어 있고 부지는 약3000평에 이르렀다.
공이 상소를 올려 완강하게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이 낙성되자 국은에 감사하는 뜻으로
당호(堂號)를 "수고은거(壽考恩居)"라 했는데 앞 정면에는 괴상한 돌로 꾸며진 괴석원(怪石苑)과
뒷편에는 십청원(十靑園)이란 정원이 있어 노년의 서식소(棲息所)로서
세칭 은거당(恩居堂)이라 불리워졌는데 한국전쟁으로 전부 소실되어 지금은 그 자취조차 찾기 힘들다.
1679년(숙종5) 6월에 공이 영상(領相)을 탄핵하는 소를 올리자 임금이 노함에 죄를 청하고
연천으로 돌아 왔는데 이듬해 5월에 양사의 탄핵을 받아 삭출(削黜)되고 유배를 청하는
여러번의 상소를 임금이 윤허하지 않아 모면하였다.
1682년(숙종8) 4월 27일에 일생을 마치니 향년이 88세였다.
1686년에 관작(官爵)이 복구되고 다음해에 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선영 건좌(乾坐)에
부인과 합장으로 장사 지냈는데 임금이 제수(祭需)를 내리고 제문을 지어 승지를 보내
제사 지내고 또 자손들을 등용하고 문집을 간행하도록 명하였다.
2년 뒤에는 사학유생(四學儒生)의 상소를 가납하여 마전(麻田)에 미강서원(嵋江書院)을
세우도록 해 사액(賜額) 하고 그 다음해에는 문순공(文純公)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선례에 따라
시장(諡狀)없이 문정공(文正公)의 시호를 바로 내렸으며 그 다음해에는 특별히 명하여
나주(羅州)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미천서원(眉泉書院)의 선액(宣額)을 내리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냈다.
뒤이어 사림(士林)들이 공의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해
경남 의령에 미연서원(嵋淵書院)을 세워 봉안 하였으며
문목공(文穆公) 한강 정구(寒岡 鄭逑)를 주향(主享)으로 모신 창원의 회원서원(檜原書院)과
삼척의 경행서원(景行書院), 부여의 도강영당(道江影堂)등에 배향(配享) 하였다.
묘소에는 공께서 스스로 지으신 자비명(自碑銘)을 새긴 표석(表石)이 있고 신도비(神道碑)는
증조부인 동애공(東厓公)의 묘비와 나란히 입구 길옆에 세워져 있는데
비명(碑銘)은 그를 사숙(私淑)한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글이다.
 
 
 
위치 :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90번지
22世 우의정 미수공 허목(許穆)의 묘는 묘비(墓碑) 및 석물 일체가
2002년 9월 16일 경기도 문화재 기념물 제184호로 지정 되어 있다.

 
* 위치 :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 17세 합천공 훈(薰), 18세 의령고령공 원(瑗), 19세 동애공 자(磁), 20세 송호공 강(강),
   21세 포천공 교(喬), 22세 문정공 미수 목(穆), 22세 영월공 서(舒)등이 모셔져 있습니다.
* 북삼교에서 묘역까지의 거리는 약 5km 정도입니다.
* 검문소에서 신분증 확인이 있습니다.

*관작(官爵) : 관직과 작위(爵位).
*궤장(几杖) : 조선시대 궁중에서 70세 이상된 1품 대신들에게 하사한 궤와 지팡이. 
 
 
번호     글 제 목 별칭/관직명 세수(世數) 시호(諡號) 봉군(封君) 상신(相臣) 공신(功臣)   청백리   호당(湖堂)   키워드  
61 조선 허교(許喬) 수옹(壽翁) 유악(維嶽) 21
60 조선 허균(許筠) 21
59 조선 허난설헌(許蘭雪軒) 21 #1
58 조선 허봉(許篈) 21 김귀영
57 조선 허방(許邦) 21
56 조선 허성(許筬) 21
55 조선 허적(許적) 21 양릉군 영사1등
54 조선 허계(許禊) 21 양평군 영사2등
53 조선 허한(許僩) 행오(杏塢) 21
52 조선 허겸(許謙) 파주목사(坡州牧使) 21 파릉군
51 조선 허응(許凝) 21 양원군
50 조선 허목(許穆) 22 문정(文正) 우의정
49 조선 허실(許宲) 22
48 조선 허완(許完) 22 충장(忠莊)
47 조선 허욱(許頊) 좌의정 22 정목(貞穆) 양릉군 좌의정 선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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