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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분류 : 조선 | ||
ㆍ별칭/관직명 : 통사랑(通仕郞) | ||
ㆍ세수(世數) : 31 |
31세손 / 호는 심석(心石) / 도학자 1845년(헌종11)~1901년(광무5년), 시조로부터 31세손이다. 벼슬은 통사랑(通仕郞)으로 행 공릉참봉이며 호는 심석(心石)이다. 미수공 목(眉叟公 穆)의 9세손이고 교관공 채(敎官公 埰)의 손자이다. 공의 편년(編年)에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은 을사년(1845) 11월21일에 출생하였다. 갑진년(1844) 가을 왕고(王考)인 참의공(參議公)이 대흥(大興)의 임소로 부임하였는데 어머니인 숙인(淑人) 정씨(鄭氏)가 모시고 갔다. 공을 임신할 때에 참의공이 꿈을 꾸니 서기(瑞氣)가 서렸는데 용이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공은 7세에 입학하였는데 총명이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 났으며 9세에 심자(心字) 모양의 돌을 은당(恩堂)의 석가산(石假山) 가운데에서 얻고는 관례(冠禮)를 하자 심석(心石)으로 호를 삼았다. 26세가 되던 경오년(1870)에 진사에 3등으로 합격 하였으며 44세에 서산 김흥락(西山金興洛) 선생이 화산(花山:안동)에서 도학(道學)을 강론하자 공은 편지로 집지(執贄)하고는 이 후로는 영화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은당강회(恩堂講會)를 설치하였는데 백록동(白鹿洞)의 규례(規例)를 따라 마침내 사문(斯文)을 창명(倡明)하는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원근의 학자들이 모두 따라와 스승으로 삼았다." 참판(參判)인 수당 이남규(修堂 李南珪)는 공의 제문(祭文)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록을 들쳐보고 역사책을 펼쳐 입으로 말함은 물결이 쏟아져 내려가는 듯 하였으며 법도를 행하여 몸에 실천함은 여유가 있었네. 중년에 돌아가 쉬니 의리를 봄이 정밀하여 용맹히 머리를 돌렸고 새벽과 밤중 언제나 엄숙하고 삼가니 조예가 깊어 굳게 다리를 밟았네. 이조(吏曹)에서 선발하고 부(府)에서 부름에 남들은 파리떼처럼 모였으나 공의 놂은 큰 붕새였고 짧은 갓끈에 좁은 소매로 남들은 참새떼처럼 지저귀었으나 공의 위의는 학이 었네. 깨끗한 흉금은 조급하게 경쟁하는 자들의 마음을 그치게 하였고 엄정한 의논은 부정함을 따르는 자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할 만하였네." * 석가산(石假山) : 여러개의 작은 산봉우리가 있는 돌을 이른다. * 백록동(白鹿洞)의 규례(規例) : 주자가 만든 백록동서원의 학칙규례를 말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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