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허씨대종회 홈페이지 홈페이지
 
 

 보주태후 허황옥 영정

 


 

허씨(許氏) 성(姓)의 연원은 멀리 가락국(駕洛國)의 시조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왕비(王妃)인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許黃玉)에 두고 있다.

 
허황옥은 원래 인도(印度)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 16세에 배를 타고 지금의 경남 창원시 웅동면 앞바다에 이르러 김수로왕의 영접을 받고 왕후가 되었다. 그 후 아들 10명을 두었는데, 허왕후가 자기 성이 이어지기를 간청하자 수로왕은 맏아들[태자(太子)] 거등(居登)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왕자에게는 허씨(許氏)로 사성(賜姓)하니 허씨 성은 수로왕비 허황옥의 성을 따르게 한 데서 유래한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불가에 귀의하여 하동칠불(河東七佛 : 경남 하동에 七佛寺가 있다)로 성불하였다고 전한다.

가락국 10대 구형왕[仇衡王 : 양왕(讓王)] 12년(서기 532년)에 신라에 합병되니 자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후 고려초에 와서 거주지에 따라 공암(孔巖), 태인(泰仁), 하양(河陽), 김해(金海)로 분관되었으니 공암은 곧 양천(陽川)이다.

  • 공암(孔巖) 즉, 양천허씨(陽川許氏) : 시조는 수로왕의 30세손인 허선문(許宣文)
  • 태인허씨(泰仁許氏) : 시조는 수로왕의 30세손인 허사문(許士文)
  • 하양허씨(河陽許氏) : 시조는 수로왕의 33세손인 허강안(許康安)
  • 김해허씨(金海許氏) : 시조는 수로왕의 35세손인 허염(許琰)
또 인천이씨(仁川李氏)도 허씨에서 갈려나온 성씨이다. 따라서 김해김씨, 허씨, 인천이씨는 이성동족(異姓同族)으로 한 핏줄이라 할 수 있다.
 

 
김해의 수로왕릉인 납릉(納陵) 정문(1620년 창건)에는 두 마리의 물고기, 활, 연꽃 봉오리, 남방식의 불탑이 조합된 장식이 단청으로 그려져 있고, 또 능의 중수(重修) 기념비(1928년 건립)에는 풍차모양의 태양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것들은 아동문학가 이종기에 의하여 지금도 아요디아 지방에서 대건축에 흔히 쓰이고 있는 장식 혹은 조각으로 판명되었다.

물론 허왕후가 인도에서 김해까지 온 경로에 대해서는 직접 바다를 건너왔는지 어떤지에 대한 통일된 학설은 없다. 현재까지 나타난 사실만으로 단정하기는 곤란하며, 몇 가지 추정만이 가능할 따름이다. 먼저 허왕후의 출발지가 인도의
아요디아가 아니라 태국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설이 있는데 그 근거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아요디아 왕가(王家)는 왕후가 출발하던 서기 48년보다 20~30년 전인 서기 20년 경에 쿠샨왕조의 군대에 의해서 왕도(王都)를 잃고 어디론가 떠났다는 것이다. 또한 위에서 인용한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조에 의하면 본국을 출발한 공주의 배가 격랑 때문에 항해가 어려워 일단 귀향해서 배에 석탑을 싣고 재출발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만약 아요디아에서 재출발하려면 갠지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6월의 풍향이 갠지스 강의 흐름과 동일하여 범선(帆船)이 강물을 짧은 기간 내에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 실재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공주의 사실상 출발지는 오늘날 태국(Thai)의 메남강가에 있는 고도(古都) ‘아유티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이 태국의 ‘아유티아’는 인도의 아요디아 왕국이 서기 1세기 이전에 건설한 식민국으로 밝혀져 있다.


다음으로 허왕후의 시호(諡號)가 ‘보주태후(普州太后)’인 점을 감안하여 김병모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보주(普州)는 중국 사천성(泗川省)의 가릉강(嘉陵江)유역이고, 허황옥은 그 곳에 살던 소수민족인 파족(巴族)출신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허황옥은 파족 중의 중심세력인 허씨(許氏)계의 여인으로, 서기 47년에 일어난 파족의 한(漢)나라 정부에 대한 반란이 실패하자 강제로 추방된 사람들 중의 한 구성원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결과 허황옥은 인도에서 직접 김해로 도래(渡來)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공주의 선조가 어떤 연유로 오래 전에 원래의 고향인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중국 사천성의 가릉강 유역의 보주지방으로 먼저 이주하였고, 공주(허황옥)는 이 보주에서 양자강을 따라 내려와 오늘날의 상해(上海)에 이르렀으며, 서기 48년 경에 상해에서 해류(海流)를 타고 가락국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허왕후가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김해로 직접 건너오지 않고 태국의 ‘아유티야’에서 출발하였던가, 아니면 중국의 사천성 보주지방을 거쳐서 들어왔는지는 쉽게 결론을 낼 수 없으나 어느 쪽이던 간에 인도 아요디아풍의 문화가 어떤 경로인가로 들어와서 수로왕 신화의 일부를 형성하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 ‘가야(加耶)’ 또는 ‘가락(駕洛)’이라는 말은 고대 인도어인 드라비다어이고 그 뜻은 모두 ‘물고기(魚)’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대와 중세의 한국어에는 드라비다어와 관련이 많다고 한다. 



 
참고자료
1. 양천허씨대종회, 『양천허씨 유적지』, 2006.
2. 가락중앙종친회 http://www.igar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