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객은 이름은 필(佖)이고, 여정(汝正)은 그의 자다. 공암(孔巖)의 세가이다. 청연(淸姸)함은 적었으나 거지(擧止)가 넉넉하였다. 성품은 온화하면서도 분명하였고, 편안하면서도 꼿꼿하였다. 남과 더불어 웃는 말을 하면 소리의 기운이 즐거워할 만하여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형 일(佾), 자상(子象)과는 기미를 같이하여 마치 한 몸 같았다.

그러나 자상은 《주역》 읽기를 좋아했고, 연객은 시 읊기를 즐겼으니, 이것이 다른 점이다. 또 재주가 많아서 전서와 예서를 잘 썼고, 사황육볍(史皇六法), 즉 소학(小學)에 능통하였으나 마침내 그 배움을 마치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사람을 골몰하게 하니 나를 한갓 힘들게 할 뿐이다." 집이 가난하여 뒤주가 자주 비었으나 태연했다. 간혹 옛 기물이나 좋은 칼 같은 것을 보면 그 자리에서 옷을 벗어 그것과 바꾸었다. 남들이 오활(迕闊)함을 비웃자 이렇게 말했다. "나라도 오활치 않으면 누가 오활하라!" 뜰에 해묵은 굴거리나무가 있었고, 섬돌에는 줄지어 예쁜 국화를 심어 두고 그 사이를 소요하며 세상 일을 묻지 않았다. 항상 말하였다. "내가 밖에서 안을 돌보지 않는 건 아내 김씨가 있기 때문이고, 안에서 밖을 돌보지 않는 건 아들 점(霑)이 있기 때문이다." 아내가 죽자 다시 결혼하지 않고, 집안일은 다 점에게 맡곁다.

연객은 명릉(明陵) 기축년(1709년, 숙종35)에 태어나 27세때 진사가 되었는데, 올해 53세이다. 문득 내게 말하였다. "내가 다행히 그대와 더불어 한 세상에서 살고 또 그대와 친하니, 내가 죽으면 점은 반드시 내 죽음을 가지고 그대를 번거롭게 할 터인데, 죽어서 그대를 번거롭게 함이 어찌 살아서 그대를 번거롭게 함과 같겠는가?" 내가 그 뜻에 느낌이 일어나 마침내 적어 이를 고한다.
명에 이른다.
"여름 이후는 점차 음(陰)에 속하고, 오시(午時) 이후는 점차 저묾에 속한다. 중년 이후는 점차 죽음에 속하나니, 연객이 이를 알아 미리 준비해두려 한다. 내가 연객에게 고하기를, 통달한 것 같지만 통달하진 않았으니 오히려 아는 것이 누가 되었도다. 옛날은 가고 지금이 돌아 오는 것이 그대의 나이이고, 아름다운 산, 좋은 물은 그대로의 거처로다. 이 나고 머리털 난 것은 그대의 권속이요, 비환비태(悲歡否泰)는 그대의 이력일세. 이씨가 그대를 위해 명을 짓고, 강씨가 이를 쓰니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1)"

글을 보면 허필은 이용휴에게 자신이 죽으면 반드시 자기 자식이 그대를 번거롭게 할 터이니, 그럴 바에야 살아서 번거롭게 함이 더 나을 것이라며 생지명을 부탁했음을 알 수 있다. 어차피 자신의 묘지명을 지어줄 사람은 그대뿐이기에 아예 살았을 때 지어달라 부탁한 것이다. 이 때 허필의 나이 53세라고 했으니, 이용휴가 이 글을 지은 건 그의 나이 54세 때인 1761년이다.

허필과 이용휴는 과갈(瓜葛)로 맺어진 가까운 사이로, 허필의 누이동생이 이용휴의 친아우인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에게로 시집갔다. 명문을 보면 '사달미달(似達未達)', 즉 통달한 듯하지만 통달하지 못했다고 톡 쏜 부분이 있다. 그가 중년 이후는 점차 죽음에 속함을 알아 죽음을 미리 준비하려 함은 통달했다 할 만하지만, 이름에 연연하여 생지명을 지었다는 건 통달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자신이 이 글을 짓고 강세황이 글씨를 써서 주니, 그대가 이 글로 안하여 죽지 않고 그 이름이 전해질 것이라 하였다. 축수의 뜻도 얼마간 내포되어 있다.

이용휴의 눈에 비친 허필의 삶은 어떠했는가? 성품은 온화하고 분명하였고, 편안하면서도 꼿꼿함이 있다고 했다. 시 읊기를 좋아했고, 글씨에 능했으며, 소학 즉 문자학에도 능통헸으나 몰두하지는 않았다. 이렇듯 사람 좋고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그는, 뒤주가 빌 만큼 가난했고, 그러면서도 고기양검(古器良劍)을 만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입은 옷을 벗어 바꾸는 골동벽도 있었던 인물이다. 오활함으로 자처하면서, 국화를 열지어 심어 도연명의 은거를 사모하는 뜻을 비추는 그런 맑은 삶을 살았다.

세계(世系)와 명자(名字)를 소개하고 행적을 적었으되, 그 인간됨의 면모를 드러내는 몇 가지만을 간추리는 데 그친 것은 자못 소략한 감이 없지 않다. 특별히 그를 칭찬한 대목도 없고, 오히려 마지막 단락과 명문(銘文)에는 마지못해 쓰는 뜻도 행간에 슬쩍 내비쳤다. 그러면서도 글은 밋밋한 평포적(平鋪的) 기술로 흐르지 않고 자못 파격적인 안배를 보여, 인물의 기이한 개성을 효과적으로 입체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생지명을 쓴 후 7년 뒤 허필이 세상을 뜨자 이용휴는 다시 〈허연객만(許煙客輓)〉 8수를 남겼다. 제3수에서는 "공암촌 주인의 손자 / 그 식견 홀로 우뚝했지. / 한 편의 생광지(生壙誌)는 / 능히 천겁의 창벽을 깨리 (孔巖村主孫 見識獨超曠 一篇生壙誌 能破千劫障 공암촌주손 견식독초광 일편생광지 능파천겁장)"라 하여, 이제 그가 다시 못 올 곳으로 갔지만 그 옛날 그를 위해 지어준 한 편의 생광지가 있으니. 천겁의 세월 속에서도 그 이름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의 앞선 생지명에 대한 자부를 드러내 보였다. 제4수에서는 "그 시는 그 사람과 흡사했으니 / 참됨이 지극하여 기이함이 드러났지. / 그 글씨와 그 그림도 / 또한 모두 그 시와 비슷했네.(其詩似其人 眞極時露奇 其書與其畵 又皆似其詩 기시사기인 진극시로기 기서여기화 우개사기시)"라 하여, 참됨을 추구하다 보니 간혹 지나쳐 '기(奇)'가 노출되기도 했고, 그의 글씨와 그림 또한 그 사람이나 그 시와 꼭 같았다고 하였다. 또 제5수 "연약해 옷조차 못 이길 듯했어도 / 용앵은 만 사내를 대적할 만했네. / 뜻 맺어 앉은 곳에서 벌떡 일어나 / 금강산 산비탈을 곧장 올랐지(弱如不勝衣 勇乃萬夫敵 意決從坐起 直上金剛脊 약여불승의 용내만부적 의결종자기 직상금강척)"라고 한 데서, 병약했지만 대단한 용기와 결단력을 지녔던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규상의 《병세재언록》에도 허필의 기록이 나오는데, 강세황과 함께 〈화주록(畵廚錄)〉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그는 그림에 능하여, 노년에 성균관 진사가 되었을 때 성균관 유생들은 그기 그린 부채가 아니면 손에 잡지를 않았다고 했다. 호가 연객인 건 담배 피우기를 몹시 좋아했던 골초였기 때문이다. 실제 위 만시 제6수를 보면. "숙동(熟銅)으로 담뱃대를 만들고 / 기이한 나무로 지팡이를 만들었네. / 효성스런 자식은 어버이 죽지 않았다고 / 생시의 모습처럼 진설해놓았구나.(熟銅爲烟具 奇木爲拄杖 孝子不死親 陳設生時象 숙동위연구 기목위주장 효자불사친 진설생시상)"라 하여, 그가 생전에 담배를 얼마나 애호했는지 짐직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정작 이용휴는 생지명에서 그이 그림이나 담배에 관한 이야기는 비치지도 않았다.

그런데 임희성의 《재간집(在澗集)》에 〈허여정필연객시권서(許汝正佖烟客詩券序)〉란 글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생지명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일찍이 연객 허여정이 내게 그 생지를 부탁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묘에 지(誌)가 있는 건 그 무덤을 기록하자는 것일세. 이제 산 사람을 가지고 지를 지으란 건가? 이것으로 어찌 무덤을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여정이 굳이 청하므로 내가 이름을 가지고 스스로 기뻐함을 나무라며 오래되어도 응하지 않았다. 대저 여정은 천하의 궁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진실로 나의 지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전할 만한 점이 있는 사람이다. (……) 금년 여름에 여정의 병이 심한지라 내가 한 번 그 사는 집을 찾아가 책상에 기대 편히 앉아 고금의 시인에 대해 이야기하며 하루해를 보낸 일이 있었다. 여정이 갑자기 탄식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나를 알지 못한다 할 수 없을 터이니 오히려 나의 생지를 새겨야 하겠으되,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내가 지은 작품에 서문이라도 써서 나의 길이 남을 생각을 이야기해주시게."라고 하였다. 내가 여정의 병이 심한데도 기운이 오히려 시들지 않음을 슬퍼하여, 마침내 받아서 여정에 대해 평소에 알던 바를 두루 논하였다. 만악 뒤의 사람이 여정을 알고자 하여 이 시집을 본다면 여정이 여정 되는 까닭을 잃지 않을 것이다.2)

이 글은 1767년에 씌어졌다. 이용휴가 1761년에 생지명을 지은 후 6년 뒤의 일이다. 글을 보면, 허필은 처음에 임희성에게 자신의 생지명을 지어 줄 것을 수차례 청하였고, 임희성은 지명이란 죽은 이를 위해 쓰는 글이니 산 사람에게 써 줄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절하고, 그래도 계속 부탁하자 왜 그렇게 이름에 연연하느냐고 나무라기까지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용휴에게 생지명을 부탁한 것은 임희성의 거절 이후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6, 7년 후 병문안을 온 임희성에게 허필은 다시금 그의 생지명을 받지 못한 것에 집착하며, 생지명을 못 써주겠다면 서문이라도 써달라고 요구하기에 이른다. 허필의 말을 빌리면 자신의 '미사지견(未死之見)', 즉 내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해달라고 했다. 임희성은 그가 중병을 앓고 있음에도 기상이 시들지 않은 것을 슬프게 여겨 서문을 짓노라고 하였다.

이 서문에는 허필이 육십 평생 배를 곯고 몸이 얼며 집안 살림은 빈 궤를 씻은 듯이 텅 빈 빈한한 삶을 살았고, 흰머리의 포의로 반생을 성균관의 상사(上舍)에서 노닐었으되, 굶주려 안색이 초췌하고 기운은 반쯤 꺾여 사람들이 모두 보고 업신여겼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의 문학에 대한 자부는 남다른 바가 있어, 때로 목청을 높여 자신의 문학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던 일을 적었다. 글을 보면 앞서 자신이 생지명 짓기를 거절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듯, 거의 생지명에 가까울 정도로 그 삶의 역정을 짙은 애정으로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1768년 여름 허필이 세상을 뜨자 임희성은 제문과 만시 15수를 각각 남겨 그 죽음을 애도했다. 만시 가운데 "종남산 아래 낡은 대문집 / 금석같은 노랫소리 열흘 굶었네(終南山下獘門扉 金石歌聲十日饑 종남산하폐문비 금석가성십일기)"의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남산 아래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굶기를 다반사로 하며 살았던 모양이다.

이로 보아 허필은 진작부터 자신의 생지명에 대해 유달리 집착했고, 임희성이 거절하자 이용휴에게 다시 부탁하여 생지명을 받아냈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또 그것으로 부족하여 병문안 온 임희성에게 시집의 서문을 다시 부탁하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허필은 자신이 높은 뜻과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남들의 업신여김이나 받으며 평생 가난과 실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다 가는 데 대한 울분이 쌓여 있었고, 그것을 누군가로부터 인정 받아 가슴 속에 쌓인 불평지심을 털여보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벗들은 여기에 연민의 공감을 담아 글을 지어 그 문집에 남겼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