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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분류 : 전라제주 |
![]() 위치:순천시 조례동150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순절한 허일과 그의 셋째 아들 허곤, 6촌 동생 허경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허일은 무예가 뛰어나 무과에 급제하여 감찰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때(1592)는 삼포수방사겸웅천현감으로 재직 중 충무공 이순신을 도와 남해 등지에서 공을 세웠다. 그 뒤 충의공 최경회와 함께 진주성을 사수하다가 이듬해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순절하였다. 허곤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따라 싸우다 한산전투에서 순절하였고 허경은 이충무공 아래서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중인 선조 26년(1593)에 처음 세웠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해체되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12년 다시 세우고 1975년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건물 배치는 외삼문을 들어서면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강당이 있고, 강당 북쪽의 내삼문을 들어서면 위패를 모신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충열사가 있다. 충렬사는 순천에서 광양으로 가는 국도변에서 왼쪽으로 300여m 지점의 외진 산등성이에 남향으로 자리한다. 충렬사는 임란때 진주성 전투에 전공을 세우고 순절한 일심재 허일(一心齋 許鎰)을 주벽으로 그의 셋째아들 재헌 허곤(載軒 許坤), 재종제(再從弟) 장암 허경을 배향하고 있다. 처음 건립은 왜란중인 선조 26년(1593)으로 전하나 어디에 창건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 후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되었고, 그 뒤 1912년에 지금의 조례동에 다시 세웠으며 1975년 중건하였다. 허일은 순천 출신으로, 특히 무예(武藝)가 뛰어나 무과에 급제하여 감찰을 역임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삼포수방사겸웅천현감(三浦守防使兼熊川縣監)으로 재직 중 충무공 이순신을 도와 남해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 후 충의공 최경회와 함께 진주성을 사수하다 이듬해 6월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순절하였다. 선무원종공신일등훈에 녹훈되었다. 허곤은 임진왜란때 아버지를 따라 싸우다 한산전투에서 순절하였고, 허경은 이충무공 아래에서 전공을 세웠다. 충열사의 건물배치는 외삼문인 여주문(如主門) 3칸을 들어서면 강당인 세수재(世守齋)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맞배지붕이며 세수재 북쪽으로 협문 1칸이 있고 다음으로 내삼문인 소현문(昭顯門)이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신실인 충열사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맞배지붕이다. 신실 남동쪽에서는 정면 4칸의 직사(直舍)가 있다. 사당은 전면 반칸을 툇간으로 개방하고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2고주 4량가의 구조이다. 이처럼 충열사와 같이 임진왜란 때 전사 혹은 전공을 세움으로써 그 문중에 의하여 사당을 세워 문중의 명예로 삼은 사례는 많은데, 특히 충렬사는 한 가족원이 전투에 참가하여 모두 전사하였다는 점에서 남다른 중요성이 있다고 하겠다. 출처 : 순천시청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순절한 허일과, 그의 셋째 아들 허곤, 6촌 동생 허경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허일은 무예가 뛰어나 무과에 급제하여 감찰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때(1592)는 삼포수방사겸웅천현감으로 재직 중 충무공 이순신을 도와 남해 등지에서 공을 세웠다. 그 뒤 충의공 최경회와 함께 진주성을 사수하다가 이듬해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순절하였다. 허곤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따라 싸우다 한산전투에서 순절하였고 허경은 이충무공 아래서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중인 선조 26년(1593)에 처음 세웠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해체되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12년 다시 세우고 1975년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건물 배치는 외삼문을 들어서면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강당이 있고, 강당 북쪽의 내삼문을 들어서면 위패를 모신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충열사가 있다. 충렬사는 순천에서 광양으로 가는 국도변에서 왼쪽으로 300여m 지점의 외따른 산등성이에 남향으로 자리한다. 충열사는 임란때 진주성 전투에 전공을 세우고 순절한 일심재 허일(一心齋 許鎰)을 주벽으로 그의 셋째아들 재헌 허곤(載軒 許坤), 재종제(再從弟) 장암 허경을 배향하고 있다. 처음 건립은 왜란중인 선조 26년(1593)으로 전하나 어디에 창건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후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되었고, 그 뒤 1912년에 지금의 조례동에 다시 세웠으며 1975년 중건하였다. 허일은 순천 출신으로, 특히 무예(武藝)가 뛰어나 무과에 급제하여 감찰을 역임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삼포수방사겸웅천현감(三浦守防使兼熊川縣監)으로 재직중 충무공 이순신을 도와 남해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 후 충의공 최경회와 함께 진주성을 사수하다 이듬해 6월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순절하였다. 선무원종공신일등훈에 녹훈되었다. 허곤은 임진왜란때 아버지를 따라 싸우다 한산전투에서 순절하였고, 허경은 이충무공 아래에서 전공을 세웠다. 충열사의 건물배치는 외삼문인 여주문(如主門) 3칸을 들어서면 강당인 세수재(世守齋)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맞배지붕이며 세수재 북쪽으로 협문 1칸이 있고 다음으로 내삼문인 소현문(昭顯門)이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신실인 충열사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맞배지붕이다. 신실 남동쪽에서는 정면 4칸의 직사(直舍)가 있다. 사당은 전면 반칸을 툇간으로 개방하고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2고주 4량가의 구조이다. 이처럼 충열사와 같이 임진왜란 때 전사 혹은 전공을 세움으로써 그 문중에 의하여 사당을 세워 문중의 명예로 삼은 사례는 많은데, 특히 충열사는 한 가족원이 전투에 참가하여 모두 전사하였다는 점에서 남다른 중요성이 있다고 하겠다. [출처] blog.naver.com/nocleaf / 문화재자료 제6호(전남) 충열사(忠烈祠) 정면 3칸.측면1칸.맞배지붕 조선중기 임진왜란(1592)때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19世 일심재 허일(許鎰), 허경(許鏡), 20世 허곤(許坤)을 배향한 사우로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 되었다가 녹권과 교지를 문화재로 지정받아 재건한것이다. * 문화재자료 제6호(84년2월29일) |